본문 바로가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멩가리 論 - 한국시문화회관 - 문예도서관 - 문예도서관

Top 영역 건너뛰기
Top 영역 끝
본문 시작

문예도서관

문예도서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식, 정보, 중요한 자료들을 편집자들이 집필해 놓은 공간입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멩가리 論

김민구 
 1. 

 먼 조분석 섬에서 날아온 새들은 어느 페루의 해변에서 자신의 길지 않은 생을 끝낸다. 그들이 어째서 이곳 페루의 해변만을 오로지 자신의 최후를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여기는지 과학적으로 판명난 적이 없다. 저 장엄하고도 처절한 죽음으로의 여정은 냉철한 이성으로나 감각적 시상으로나 정확히 규명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조분석 섬에서 태어나 광활한 하늘을 비상하고 바다와 바람의 냄새를 맡던 나날들, 바깥으로 잠깐 고개를 내민 먹잇감을 발견하고 우아하고도 신속한 날갯짓으로 수면에 닿을 듯 날아가 숭어들을 잡아먹곤 하던 生, 그런 새들은 제각기 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먼 거리를 날아와 페루의 해변에서 죽어간다. 로멩가리의 단편작이자 심오한 철학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사해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페루의 어느 해변에서 카페를 경영하는 남자가 스스로 파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해준다는 간단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플롯 아래 내재되어 있는 철학은 무척이나 심오하다. 새들이 날아와 저마다 생을 마감하는 기이한 해변과, 한때 카스트로를 따라 전쟁에 참가하는 등 혈기왕성한 젊음의 나날을 보냈으나 이젠 자신의 비루한 육체와 작은 카페만 덩그러니 남은 고독한 인생과, 부유한 영국인 노신사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사랑이 부재한 삶을 살다가 타인으로부터 능욕당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여자와, 그녀의 고독과 허무주의를 하나의 질병으로 치부하고 명의에게 데려가 치료를 받아보자고 고집하는 노신사와의 상관관계를 밀도있게 다룬 작품인 것이다. 
 2차대전 당시 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로멩 가리는 1945년 <유럽의 교육>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했다. 그리고 1960년, 자신의 유년기와 성장하여 공군 장교 신분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경험, '무엇이든 되고 싶었던' 자신의 자아, 그런 소망이 실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지원을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승화해낸 <새벽의 약속>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 할 것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사내란 <새벽의 약속>에서 수많은 전투와 고난을 넘어온 자신이 투영된 인물일 것이다. <새벽의 약속> 후반부에서, 주인공 로멩은 전쟁이 끝나고 귀국하여 어머니에게 자신의 저작들을 보여드릴 생각이었으나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고독과 비통에 휩싸여 해변에 누워 지나온 나날들을 반추한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상당한 유사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초반부는 주인공 레니에가 자신의 카페 테라스에 나와 고독에 잠겼다는 것을 기술하며 시작된다. 그 후 작품은 레니에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밀도 깊은 고독의 근원과 새들이 왜 이곳까지 날아와 죽어가는지에 대하여 탐구하는 과정-이라기보단 상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을 때부터 로멩 가리는 늘 고독한 자아를 투영시켜 작품을 창작해왔다. <새들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새벽의 약속> 후반부에 등장하는 광활한 해변이 있다. 이 해변에서 주인공 로멩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추억하며 누워 있다. 그는 <새들은…>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한 마리의 상처 입은 새에 다름 아니다. 그쪽의 해변이나 이쪽의 해변이나 같은 상관선에 존재하는 곳이리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새벽의 약속>의 연장이 <새들은…>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든 혹은 작품 자체를 창작해낸 로멩 가리 자신이든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비쳐 보인 수많은 사람들이든 모두가 '상처입고 날아와 해변에 떨어져 죽는 새'의 범주에 들어 있다. <새들은…>에서 제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근원적 고독은 독자와 세상에게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다. 그건 '고독은 무엇인가?' 가 아니라 '무엇이 고독인가?'에 더 가깝게 다가가 있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새들의 기이하고도 자발적인 죽음으로의 시동을 정확하게 규명해내지 못한다. 단지 원인이 분명 있기는 있을 거라고 말한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 원인이 존재하고 있기에 새들이 날아와 죽는다는 말이다. 알 수 없는 그 원인은 마치 인력이나 중력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고독의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가늠할 수 없을 만치 깊은 심연에 담겨 있는 고독을 치유하기란 쉽지 않다. 해변에 까맣게 누워있는 새들처럼 죽음을 맞이하든지, 혹은 타인에게 윤간당한 여자처럼 거대한 파도 앞으로 돌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도를 행하든지 혹은 주인공 레니에처럼 카페 테라스에 앉아 그 고독이 어떠한 형상과 영향으로 세상을 더욱 알 수 없도록 만드는지 관조하든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리라. 


 2-1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에 등장하는 주동인물은 크게 두 명이다. 한 명은 주인공격인 레니에이고 다른 한 명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여자다. 그들은 페루의 해변에서 만나기 전까지 아무런 인연이 없었으며 서로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본고에서 좀 더 깊이 다루어야 할 것은 오히려 주인공 사내 레니에보다는 이 이름 모를 여자일 것이다. 의미 없이 말하는 거지만 레니에에 대한 정보나 내적 심리 상태에 대해 독자가 지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독한 고독감에 시달리는 한 명의 인간일 따름이다. 이후에 레니에의 내적 자아를 다루기 위하여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 속 구양봉(장국영 분)이라는 캐릭터를 비교해보는 것으로 하고 이번은 이 여자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부유한 영국인 노신사와 결혼하여 아내가 된 이 여자는 도시에서 사육제가 열리는 날에 바깥을 나섰다가 어느 정체 모를 세 명의 남자에게 납치되어 윤간당하고 풀려난다. 처절한 슬픔으로 몸부림치던 그녀는 새들이 죽어 있는 푸른 해변으로 가 파도를 향해 뛰어든다. 이른바 순결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자기 살해의 순간에 뛰어든 것이다. 파도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달려온 레니에에 의해 구출된다. 우리는 그녀가 구출되기 직전, 그러니까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버리기 위해 해변에 달려갔을 때의 복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고리와 반지와 팔찌를 하고 있었고, 손에는 줄곧 초록색 스카프가 쥐여져 있었다. 새벽 여섯시, 죽은 새들로 뒤덮인 이 후미진 해변에서 금과 다이아몬드와 애메랄드로 치장한 채 이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야회복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목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두 손에는 금붙이와 애메랄드를 주렁주렁 달고 슬프게 웃고 있는지 묻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다. 

물론 <새들은…>은 정확한 인과관계로 구성된 작품은 아니다. 애초에 해변으로 날아와 죽음을 맞이하는 새의 기이한 운명에 대하여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는 것에서 작품이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페루의 해변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의 단면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들에 의해 조정되지 않는다. 물론 세상의 구성원들 간에 지켜야 하는 윤리의식이야 존재하고 있겠으나 수많은 변수에 의해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항상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짐작이나 할 수 있을 뿐인데, 발췌한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여자는 자살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려는 사람이 어째서 진귀한 보화들을 몸에 걸치고 바다로 뛰어든단 말인가? 순결과 영혼은 빼앗겼지만 자신의 육체를 치장하는 아름다운 장신구들은 남에게 줄 수 없다는 보호의식이란 말인가? '조금 커진 채 고정된 맑은 눈과, 주위의 세상이 갑자기 한결 가벼워지고 한결 짊어지기 편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마침내 세상을 품에 안아 더 나은 운명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부드러운 어깻짓'을 지니고 '극도로 창백한 얼굴은 섬세했고 아주 진지하고 커다란 두 눈이 그 눈과 잘 어울리는 물방울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나 한 번의 불행으로 인해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서 삭제해버릴 결단을 내릴 만큼 무서운 여자다. 그녀는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는 가엾은 새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죽음을 향한 시도가 빗나간 다음에도 그녀는 레니에에게 카페에서 머물 것을 청하며 죽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싶어한다. 노신사가 말했듯 이곳은 '세상의 끝'이며 레니에가 생각했듯 인도의 성지 같은 '바라나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죽음에서 구해줬다고 하여 반드시 감사가 수반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세상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자기 불행의 연속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먼 바다에 섬들이 있소. 조분석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여기로 왔죠?"
 "저 카페를 운영하고 있소. 여기 살아요." 

  그녀는 해변에 죽은 채 누워 있는 새들을 보고 의아해한다. 해변의 백사장을 모두 검게 덮을 정도로 죽어 있는 새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구심을 느끼며 그것에 대하여 동질감을 느낀다. 산 자가 죽은 것을 볼 때 그들은 동질과 이질을 모두 경험한다. 저것은 자신의 미래인가 혹은 과거와 현재인가. 그녀가 죽어 있는 새의 운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그녀 또한 죽음을 선택하게 된 연유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다. 순결을 잃고 나서 그녀의 몸은 세상을 살아갈 힘이 모두 소진되어 허물어지고 있다. 결국 그녀는 카페에 머물러 있다가 자신을 찾으러 온 남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자살을 계획하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녀의 삶은 잠깐 연장되었고 새로운 문제가 출현하기 전까지 그녀는 상처입은 몸을 치유하며 날갯짓을 계속할 것이다. 


 2-2 

  스페인 내전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베르코르의 지하운동, 쿠바에서의 전투를 겪은 자크 레니에는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안데스 산맥의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해 작은 카페를 경영하고 있다. 마흔일곱의 그는 소설 초반부에서 고독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다 새들이 날아와 죽어있는 광경을 보고 이 세상을 조율하는 거대한 힘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의 자아는 철벽 같은 고독 속에 침잠해 있다. 가족도 없이 그저 홀로 카페를 운영하는 처지에 있는 그는 이 황막한 죽음의 해변가에서 남은 여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만을 놓고 보자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이 떠오른다. 1994년에 처음 제작되었다가 2008년 고 장국영을 기리기 위해 왕가위 감독이 다시 필름을 보완하여 재상영된 작품인데, 오랜 상처와 실연으로 인해 고독에 빠진 사람들이 끝도 보이지 않는 사막을 지나며 여정을 다하는 이야기다. 사막에는 구양봉(장국영 분)이 운영하는 작은 객잔이 있으며 그는 자신의 객잔에서 살인 청부를 중재하는 중개인으로서 살아간다. 구양봉의 객잔이나 자크 레니에의 카페나 모두가 고독한 여정 중에 존재하는 정거장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굳이 언급할 필요 없더라도 <동사서독>의 사막이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의 해변일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제작이든 로멩 가리의 문장력이든 푸르게 젖어 있는 바다와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을 거의 같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삭막한 캐릭터들의 자아를 들여다보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그저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페루의 해변에 와서 죽어버리는 새들을 보며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더 나아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상념일 뿐이므로 크게 구조를 갖고 있지는 않다. 어찌 보면 그저 무의미한 연상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고독의 표면을 굴착하듯 깊게 파고든다. 어느 날 파도로 뛰어들어 자살하려는 여인을 구해준 다음부터,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레니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새 한 마리를 구하고 보호해 여기 세상의 끝에 자신과 더불어 머물게 함으로써, 종착점에 이른 자신의 삶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한순간 그의 얼굴에 밝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이 파도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던 이유를 설명해주기 전까지 그는 상대방의 눈동자에 고여 있는 눈물이 사랑의 슬픔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슬픔은 이별과 고독을 수반하기 때문에, 레니에는 여자가 가지고 있는 고독을 치유할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고독을 치유해줌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의 고독에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기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레니에의 문장은 쉽고 간명하다. 많아도 두 문장을 넘지 않는다. 고독이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든 것인지, 그로 인하여 스스로 생각을 전개하여 남에게 표출할 틈 없이 그저 고독의 풍경을 바라보듯 상대방을 관조하려는 성격의 발현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농밀한 고독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말이 많은 데에 반해 고독과 절망을 경험한 두 주인공의 말은 건조할 정도로 간명하게 나타난다. 질문을 받으면 그에 해당하는 대답만이 짧게 돌아오는 레니에의 목소리에서 우린 이 작품 자체가 다루고 있는 불확실성과 고독의 진면을 조금씩 알아나간다. 

 "몇 미터만 갔으면 물결에 휩쓸려갔을 거요. 이곳 파도는 몹시 사납소."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거요. 언제나 한 가지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 

  작가의 의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렇게 짧은 대화에서 우리는 깊은 어간의 울림을 본다. 가령 생텍쥐베리의 <야간 비행>을 잠깐 보자. 나는 이 작품에서 마지막 문장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남은 연료 00분, 아직 수면 위를 날고 있다.” 연료가 바닥나면 우편 비행기는 바다에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달라며 고함을 치거나 구조를 요청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현재의 감상을 짧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담담한 어투에서 <야간비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역시 레니에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아까 고독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는데, 파도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 레니에와 여자 사이엔 아무런 인과적 관계도 놓여있지 않았다. 여자를 구출하고 위로하는 부분에서도 레니에는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묻지도 먼저 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상처 입은 새, 갈 곳 없는 새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로멩 가리는 그들에 대한 장황한 과거 이야기를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고독의 상징성을 핍진하게 드러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압축이 아니다. 할 말만 하는 것이다. <새벽의 약속>에서의 주인공 로멩의 연장적인 캐릭터 자크 레니에는 페루 해변에서 죽은 새들의 고독을 관조하는 사람이자 자신의 고독과 더불어 범인류적인 고독의 치유를 위해 고뇌하는 사람이자 작은 정거장 같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세상의 끝을 지키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3

  주인공 두 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이제 그 두 명을 둘러싼 타인에 대하여 언급할 차례인 것 같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 여자를 둘러싼 타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결단하게 만든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세 사람을 먼저 살펴 보자. 그들은 도시에서 사육제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사육제에 쏠려있는 것을 이용하여 호텔 바깥으로 나온 그 여자를 납치하여 차에 태우고 윤간한 바 있다. 불확실성과 증명되지 않는 만상(萬象)이 공존하는 이곳 페루의 해변은 세상의 끝이자 외곽이며 표준, 규칙, 율법이라고 말하여지는 모든 것들이 힘을 발휘하지 않는 공간이다. 

  해골 가면을 쓴 사내는 모래언덕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 병나발을 불고 있었고,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두 눈 위로 흘러내린 하얀 가발을 쓴 채 여전히 자고 있었으며,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을 여기저기 칠한 사내는 주저앉아 들고 있던 여자의 하이힐 한 켤레를 골똘히 바라보더니,  (···) 모래 속에서 브래지어 하나를 꺼내 입술에 댔다가는 바닷속으로 내던졌다. 

세 사내는 서둘러 그곳을 뜨려 하지 않았고 경찰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자신들의 느낌을, 흡족했던 사육제의 마지막 편린들을 조용히 음미하는 중이었다.

  여자를 윤간한 세 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해변에 술 취하여 누워 있다. 아직 향기가 가시지 않은 여인의 옷가지를 맡으면서 ‘사육제의 마지막 편린들을’ 영원히 기억에 담아두려 하고 있다. 희생양의 상태 따윈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설령 현장에서 여인을 살해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규칙과 법규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악역들이다. 그들에겐 자기들만의 쾌락과 욕망 충족이 전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희생양은 그러한 포식자들, 강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 저항은 없고 오직 도피만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여자의 남편은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레니에의 카페 앞에서 등장한다. 그는 분명 부유한 신사이지만 아내의 고독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진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까닭에 그는 어떤 아집 같은 것에 갇혀 있다. 아내의 절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고독을 하나의 질병이라 생각하고 뛰어난 의사이자 병리학자에게 데려가 상담을 받아보자고 종용한다. 그는 애초에 고독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므로 그의 말은 여과 없이 장황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그 노신사는 아내보다도 아내가 갖고 있는 보석에 더 신경을 쓰기도 한다. 

저 사내들이······. 그녀의 보석을 빼앗지 않았어야 할 텐데. 한 재산 되는 데다 보험회사에서도 물어주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그녀의 부주의를 물고 늘어질 거요.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목을 비틀고 말겠지. 

  그러다 카페의 창이 열리면서 아내가 등장하자 그는 걱정하던 참이었다며 이중적인 면을 보인다. 그는 실속만을 따지는 사람이며 고독이나 불안에 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도 고독을 병증이라고 여기는 태도에서 아내인 여자는 그를 증오한다며 자신을 떠나라고 한다. 그러자 노신사는 까다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치유된 여러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소위 몬테비데오의 귀즈망 교수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 교수로부터 치유된 여자들은 까다롭고도 비이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으나 다 정상적인 주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는 분명 어떠한 당신의 모습과 요구에도 그대로 행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사실 그 노신사는 자신의 삶과 척도에 아내를 맞추려는 사람인 것이다. 계속 그는 술에 취하여 자기 생각으로 보았을 때에만 논리적인 장광설을 뱉어낸다.    
 노신사는 어찌 보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하나의 새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이르는 병인 불안이나 고독을 경험하지 못해 아직까지는 세상의 끝으로 날아갈 준비가 안 된 새. 그는 떨어진 새들을 보고 의구심만 들 뿐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의 눈에는 페루의 해변에 죽어 있는 새들의 육체가 그저 흥미로운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도 기이한 새의 운명에 대하여 분명 이유는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며 카페를 떠나간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이유는 단편적인 것이다. 이유를 알든 알지 못하든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3.
  
  페루의 해변은 새들의 무덤이다. 우리나라 노랫말에 나오는 것처럼 ‘새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육체가 아닌 영혼의 고향 말이다. 서로 다른 먼 곳에서 태어나 바람을 비상하다가 한 곳으로 회귀하여 최후를 맞이한다. 영혼의 안식처를 향한 집단적 무의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시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새들의 최후는 처절하거나 구차하지 않다. 사진으로 본 적도 없고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엔 한 번도 들어본 바 없지만- 나는 그것을 장엄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페루의 해변과 자크 레니에의 카페는 고독한 인생의 여행자들이 잠시 들르는 정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거장은 도피처나 휴식처는 될지언정 언제고 머무를 수 있는 종점은 못 된다. 페루의 해변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의 단면이고 그 불확실성으로부터 파생되는 변수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경험 속에서 행복과 불운, 동반과 고독 모두를 전달해준다. 세상의 만물에 대하여 어느 박식하고도 내밀하게 고독한 자가 있어 새들이 떨어져 죽는 이유를 설명할 것인가. 새들은 허공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육체가 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허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그 충격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인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아 날개를 퍼덕이는 새들은 어떤 상처와 절망을 지니고 날아왔던 것인가.

  “발 없는 새가 있대.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다더군. 평생에 꼭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라는 거야.” - <아비정전> 中

  페루에 해변에서 지천으로 죽어있는 새를 상상하면 나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독백하듯 말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늘 사람들은 지상에 발을 붙이지 않고 날아다니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땅으로 내려앉는다는 상상 속의 새. 고독의 결과는 이렇듯 장엄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날다가 지쳤으나 아직 바람 속에서 날갯짓하는 새(자크 레니에)와 힘이 다하여 땅으로 내려앉을 뻔 하였으나 다시 힘겨운 하늘로 날아오른 새(여자) 모두에서 우리는 인간 공존의 고독을 로멩 가리의 아름다운 문체로 감상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배경은 단순한 무대로서의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진짜 세상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도 사실을 반영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새들은···>에서 페루의 해변은 지극히 제한되고도 정지된 풍경이다. 죽어있는 새들의 모습과 해변 위의 카페가 작품 속 배경의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페루의 해변을 바라보며 수많은 상념과 고뇌를 반복한다. 멈춰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우리 삶 속까지 밀려와 파도치는 페루의 해변. 새들에게 그곳 해변은 세상의 끝이자 더 이상 날갯짓을 하여 다다를 수 없는 초극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고독의 간이역에서 살아가는 자크 레니에도 파도를 향해 두 팔 벌리고 뛰어들었던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떠나고 싶으나 이젠 고독을 관전하는 것 밖에는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마흔 여섯의 생애. 레니에는 여자가 그녀의 남편과 떠나버린 해변에 남아 죽은 새들과 아무 인기척도 없는 카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4. 

  페루의 해변을 삼켜내는 거대한 파도나 세월에 의해서든 혹은 누군가가 모두를 치워내든 백사장은 다시 말끔히 치워질 것이고 또 다른 무리의 새들이 날아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확실한 이유는 역시 없다.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에 원인을 규명해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죽은 날개들의 공간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고독을 맛본다. 더 이상 비상할 수 없는 까만 날개들. 그들에 대한 고뇌와 위령이 작품 속 인물들을 독자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로멩 가리 자신은 그 고독을 생전에 이겨내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는 결국 권총을 머리에 쏘아 생을 마감한다. 그에게 방아쇠를 당길 힘을 부여한 것은 고독이었을까? 상처와 불안으로 얼룩진 로멩 가리라는 이름의 새는 자신이 숨쉬고 날갯짓하던 하늘에서 단단하고 성긴 죽음의 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페루의 해변에서, 저 새들은 허공에 날갯짓하고 있어야만 살아있는 것이고 땅을 딛는 것은 자신의 숨통이 끊겨 추락하는 때가 전부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하는 직립보행족인 사람과 천공을 날아다니면서 비행생명체로서 살아야하는 새들, 그들 사이에는 고독이 있다.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질병이라고 인식했을 때 더욱 증세가 심각해지는 감정, 작가가 결국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고 성공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하다. 그는 죽어서도 페루를 향해 영혼의 날개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작품을 통해 사회가 갖고 있는 부조리나 허위의식을 고발하는 생을 살다가 갔다. 인간 내부에 공존하는 상반된 각각의 자아들이 저 죽어버린 새 한 마리 한 마리를 대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기댈 곳 없이 외로운 감정들, 나로부터 기인하고 나에게서 끝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고독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 있었을까. 나는 짧은 생각을 담은 글로써 그를 위로하려 한다. 나도 언젠가는 문학적·육체적 삶이 종결되면 페루로 날아가야 하리라. 새들이 페루에 와서 죽는 이유를 안다면 무엇이 고독이고 무엇이 치유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품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지 확실한 모범답안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리송한 말이지만 비로소 죽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죽어선 안 된다. 평온하든 불안하든 닿는 곳까지 날개를 펼치고 살아가야 한다. 김영승 시인이 <이방인>이라는 시에서 말하였듯, ‘함소입지(含笑入地)’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쉼없이 날개를 움직여야 하리라. 

목록

문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