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알베르 까뮈 作) / 옮긴이 김화영 / 책세상 출판
김민구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문과 의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던진다. 그것들 중엔 하나의 정석으로 알려져 있는 모범 답안이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대답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확실한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들도 적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라는 의문인데, 이 선문답(禪問答)의 화두 같은 질문에는 사람 개개인마다 내릴 수 있는 답이 각기 다를 것이다. 세상엔 기대할 수 있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등의 변수가 무수하게 존재하므로 어느 누구는 삶이 뜻있다 말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생각도 얼마든지 거론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최고의 철학적 난제라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하여 알제리의 소설가 알베르 까뮈는 세상은 부조리하다, 라는 내용을 근간으로 하는 자기만의 견해를 『시지프 신화』라는 책에서 밝혔다. 카뮈는 부조리 자체의 속성과 영향에 대해 첫 번째로 [부조리의 추론]에 관하여 썼고, 부조리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 두 번째로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글을 썼으며,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업 방식에서 나타나는 부조리의 속성에 대해 [부조리한 창조]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시지프 신화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시지프라는 자가 신의 노여움을 사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옮기는 무한의 벌을 받는 내용이다. 간신히 올려놓으면 바위 자체의 무게로 인해 다시 비탈로 내려가게 되어 다시 일을 반복해야 하니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와도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는 이 이야기는 신이 용서하지 않는 한 끝없이 계속되어지는 형벌인 것이다. 카뮈는 위의 세 가지의 주제 하에 사유한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시지프 신화에 접목시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세상에는 이율배반과 무수히 급변하는 규칙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에 부딪혀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 모두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인내하는 데에는 모든 사람에게는 부조리에 의한 회의감과 동시에 삶을 더욱 진행시키기 위한 애착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카뮈는 1장을 읽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사람을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가 정말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논리가 주는 절박함이 자신의 본질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카뮈도 이에 동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길 참다운 노력이란 가능한 살아 버티면서 모든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생각이라는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들은 모호성, 구체성, 의구심, 불확실성 등 서로 공존할 수 없는 형태의 것들이다. 생각 자체가 부조리임에 착안한 카뮈는 끝없는 사유를 통해 모든 모습들을 실질적으로 정의내리고 판단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 무한한 사유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에 대해 의심을 품는, 다소 데카르트적인 성찰과 유사한데, 계속 탐구하다가 불현 듯 마주치는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이 바로 부조리의 실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아득한 의식의 깊이까지 파고들다 보면 사유하는 행위 자체에 모순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가령 하나의 명제를 발견한 경우 그 반대의 성질을 갖는 법칙의 존재를 우리는 말하지 않고도 동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러 답안의 제시가 가능한 문제에 대해 사유하다보면 어느 하나의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없는 탁상공론만 되풀이할 것이다. 분명히 아는(明知)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인식 때문에 결국 부조리를 확연하게 분석하고 정의하는 것 자체는 그저 혼돈에 지나지 않음이 자명하다. 빠져나갈 수 없는 혼돈 사이에서 카뮈는 “부조리란 합리성을 향한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지금껏 수많은 학자들이 부조리에 관해 제 의견들을 피력했지만 모두들 제 주장만 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유는 세상사가 좀처럼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충돌이 부조리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충돌은 의식의 깊이를 넘어 어떤 반향이나 불균형을 일으켜야 하지만 부조리라는 속성은 어느 한 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충돌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으므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합리와 비합리, 균형과 불균형 사이의 갈등을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한 유대야말로 부조리라고 보았다. 카뮈는 후에 부조리함을 이루는 세 가지의 경우는 세상과 풀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는 자신의 반항, 그로부터 도피하거나 구애받지 않으려는 자신의 자유, 그리고 뜻을 굽히지 않고 사유의 끝없는 연못 속으로 뛰어드려는 자신의 열정임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부조리는 결국 상극(相剋)의 어느 무언가가 동시에 한 자리에 존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확연해진다. 바위를 간신히 정상으로 올려놓았으나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걸 바라보는 시지프를 상상해보자. 그는 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이 형벌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주 자명하게 알고 있다. 성공의 희망은 없으며 탈출의 시도 또한 불가능하다. 성공이나 미래가 아니라 그저 현재와 거듭되는 징벌의 굴레에서 살아야 하는 시지프의 삶 자체가 첫 번째 부조리이고, 만약 그가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이런 일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할 때 바위는 그의 것이 되고 노동은 그의 것이 되며 고통을 응시할 수 있는 용감성 역시 고스란히 그만의 것이다. 신의 징벌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을 때 시지프는 자신의 세계를 영원히 가질 수 있다는 논리도 부조리의 시학에 의해서라면 출분히 존재할 수 있다.
결국 부조리란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달린 것이 아닐까. 까뮈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기는 했지만 100% 확신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까 처음에 내보였던 삶의 가치를 묻는 문제처럼 셀 수 없는 대답의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모든 사람이 생각을 달리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의 사유에서는 이것이 합리성을 지닌 평등적 구조를 띠다가도, 잠깐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면 불균형성을 띤 부조리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 생각하기 나름인가. 책을 완전히 정독하지 않아 이해하기가 어렵다. 끝없는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복구되는 형벌의 공간에서, 시지프가 만약 부조리의 시학에 대해 깨달았을 때 과연 어떤 견해를 이루어낼 것인지 궁금하다. 문득 『무간도』라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의 글귀가 생각난다. 『무간도 1』이 끝난 후 까만 바탕에 이런 말이 새겨진다. “지장보살본원경에서 말하길, 이러한 무리들은 무간지옥에 떨어져 천만억겁이 지나도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무간지옥에서 제일 큰 고초는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부조리가 갖고 있는 수천수만의 얼굴들 중 하나는 심오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오래도록 사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는 인식에서 가장 극악한 죄인들만을 영원히 수감한다는 무간옥의 고통스러운 형기(刑期)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비단 저승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같은 상황을 보고도 수십 개의 가능성으로 갈릴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는 세상사가 아닌가. 하지만 비합리가 있어야 합리가 있는 법이니, 아마 세상을 세상답게 하는 것은 분명 부조리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