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2000 과월호]
고은 시인을 뵙기 위해 찾은 세종로 천주교회. 한여름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시끄러운데, 교회의 주변 도로에 예사롭지 않은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 끌밋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정장 남자들이 여기저기 서성거렸다. 기자는 교회입구를 들어서다가 그들 중의 한 명과 어깨를 부딪쳐야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생환기념 미사' 정장 남자의 정중한 설명에 기자는 아하,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고은 시인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시는 것은 역사의 질곡을 함께 헤쳐온 동지들을 만나보기 위해서구나. 그 미사가 끝날 쯤에 맞추어 기자와의 인터뷰 시간을 약속하신 것이었다.
기자는 뒤이어 도착한 문학동인 세 사람과 함께 미사가 끝나기를 강당 바깥에서 기다리며 고은 시인에 관한 자료를 돌려보았다. 시, 소설, 평론 등에서 100여권 이상의 저서를 내신, 한국문학사에서 전무한 필력을 현재진행형으로 왕성하게 휘두르시는 65세의 청년.
한국전쟁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고 두 차례 자살 시도 끝에 출가, 52년에 법명 一超를 얻었다. 조지훈 선생의 천거로 시단에 처음 이름을 올렸고, 58년에 미당 선생의 단회추천으로 정식 등단.
첫 시집 『피안감성』(1960년)에서 『신 언어의 마을』(1967년)에 이르는 시기의 시들은 바닥을 알 수 없는 허무의식을 탐미적 감각으로 형상화한 것들로 평가받는다. 그 세월의 사이에서 환속.
1970년대 초반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에서 벼락을 맞은 치열한 역사의식이 『문의마을에 가서』(1974년)부터 담겨지기 시작하여 『새벽길』(1978년)에 이르면 분단체제의 고착과 군사독재로 일그러진 민중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
안성으로 집을 옮긴 후 처음 발간된 『전원시편』, 특히 1984년 중반에 나온 『조국의 별』에서 시인의 작품은 또 한 번의 변모를 보여준다. 그것은 광주의 오월, 투옥과 죽음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때 비로소 시인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던 기자는 386세대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80년대 캠퍼스를 뒤덮은 최루탄의 내음을 아직도 코끝에 달고 다니거니와 『차령산맥』,『旗』등을 읽을 땐 여전히 눈시울을 붉힌다.)
서사시 『백두산』과 거대한 인간희곡 『만인보』의 크나큰 성과에 대해서는 비교적 근자의 일이라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최근에는 일간지에 『북한탐험』을 연재하며 시인으로서 허리 잘린 겨레에 가지는 애틋하고 절절한 애정을 풀어놓고 계신 중이다.
한 시간 넘어 걸린 미사가 끝났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하얀 드레스셔츠 차림의 시인과 함께 거리로 나섰을 때 햇살은 기세를 누그러뜨렸으나 사람의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래서 시원한 곳을 찾다가 보니 광화문 네거리까지 한참 걸어나와야 했다. 시인의 걸음은 소문대로 빨랐다. 헌걸찬 기운이 느껴질 만큼 머뭇거리거나 뒤돌아 봄 없이.
널찍한 지하 호프에 자리를 정하고 앉았을 때 시인께서는 사이다를 시키셨다. 맥주 한 잔 하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기자의 말에 손을 휘휘 내저으셨는데, 그 거부는 송기숙 선생이 표현한 것처럼 '단호하기는 했으나 완강하게 느껴지지 않는'것이었다. 결국 시인께서는 인터뷰가 시작되면서 와인 한 병을 시키셨다.
우연히 동석한 출판사의 편집장이 시인의 새 시집 표지 원안을 들고 와서 선을 보였다. 『속삭임』. 시인은 표지의 사진이 세계시인대회 촬영실에서 찍은 것이라고 기억을 더듬으셨다.
출판사의 편집장은 시인께서 새 시집 출간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자 방북 소감을 여쭤보았다. 기자도 궁금했던 것이라 먼저 그 질문부터 드려보았다.
장재선 : 고은 시인을 모시고 문학과 인생에 관해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시인께서는 언제나 현실의 역사 중심에서 뜨거운 삶을 사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최근에는 북한에 다녀오셔서 그 기행문 연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소감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고 은 : 북한이 조국의 절반이라는 걸 실감한 여행이었어요. 15일 동안 있었으니까 함북 지방 빼고는 안 가본 데 없이 가본 셈인데, 그 쪽에선 너무 많이 보여줬다고…. 눈을 크게 떴지만 기아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보지는 못했어요.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 보였는데, 부황이 든 사람은 못 봤어요. 물론 산골 같은 데는 굶주리겠지. 하지만 대체로 제대로 살고 있었어요.
장재선 : 「북한탐험」 연재 들어가시면서 의형제이신 리영희 교수님이 북녘고향을 그리는 심정을 길게 쓰셨던데요. 북한에 갖다오시고 보니 실향민들에게 미안스럽지 않던가요? 덧붙여서 리교수님과의 우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고 은 : 실향민들보다 내가 먼저 간 것에 대해서 가책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일 천만 실향민 가족의 아픔을 대신해서 리영희 교수 이야기를 쓴 거지요. 리영희 교수와 내가 성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들 하지만, 둘이 만나면 정말 기막히게 행복해요. 83년 감옥에서 나왔을 때 너무 힘들어서 술을 다시 시작했어요. 79년부터 금주, 금연하고 있었거든. 노동학교장 할 때였는데, 무언가 자기자신을 끝까지 밀어보고 싶을 때 있잖아요. 폭음을 다시 시작하니 몸 망가지고 주변 사람들도 떨어져 나가, 리교수하고 자주 어울려 다녔지. 어느 날 술집에서 곯아 떨어져 자다가 보니 옆에 리교수도 있어. 그 때 의형제를 맺게 된 거지. 그리고 지금까지…. 이거 유명한 이야기예요.
장재선 : 이번 방북을 통해 통일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셨을 텐데요?
고 은 : 나는 70년대부터 분단시대를 사는 절실한 아픔을 가지고 통일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해 왔지요. 사실 그 이전 허무주의 시대에도 그런 정서는 있어서 「콜레라」라는 시에는 분단의 죽음을 상징하는 게 나와요. 내가 콜레라로 북한여인의 몸 속에 들어가 함께 죽는 거지. 그래서 무덤 하나로 우리 나라의 흙을 이루리라는 내용인데, 그 때 우리 분단이 죽어버리는 것이지. 그 의미는 알겠지?(이때 시인께서는 옆자리의 동인으로부터 술잔을 받으시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셨다.) 통일과 더불어 2대 과제로 여겼던 것이 민주화인데 그것이 현대사를 책임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백기완, 문익환 같은 분들과 뜻을 함께 했던 것인데 현실정치 속에서는 현재 김대통령 같은 분들도 있었지. 통일운동의 하나로 85년에는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했고, 그 때문에 감옥에 네 번째로 갔다왔지. 이번 방북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더 깊이 정리해서 할 생각이에요.
장재선 : 일제시대 종군위안부의 비통한 삶을 그린 판소리 대본 『접동새』를 창작하시기도 했는데, 정신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고 은 : 우리가 식민지시대에 가졌던 항일 노선의 연장으로 일본에 무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일본은 2차대전의 패전당사국이고 우리는 남북동족상잔의 주체로서 역사적 과오를 청산해야 할 처지에 함께 있어서 어떤 연대적 의미가 있는 거지요. 일본을 원수나 적이 아닌 더불어 동행해야 할, 우리 육체와 가장 맞닿는 곳에 있는 존재로서, 전후의 독일이 자신의 죄를 사과하고 고백하여 청산한 것처럼, 그로 인해 세계사 속에서 다시 당당해진 것처럼 일본도 전쟁의 책임을 깨끗이 씻고 앞길로 나가야 해요. 일본 정부는 제국주의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완성하기 위해 배상을 끝내야 하는 거지.
장재선 : 이제 우리가 행복하게 들을 수 있는 문학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민망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정부 들어서 시인께서 한자리 하실 것이라는 이야기가 계속 떠돌았었습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시고 계속 문학인으로만 남아 계시겠는지요?
고 은 : 한자리라는 게 무어지요? (시인께서는 얼굴을 다소 굳히셨다. 기자가 밥을 벌고 있는 직장에 들어온 정보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 불쾌한 표정까지 지으셨다. 방금 전에 동인 세 사람이 와인을 조금씩 따러 한 잔을 만들어 드리자 '최고의 사치'라며 소년처럼 즐거워하시던 표정을 싹 거두신 것이다. ) 자격에 문제가 있으니 그런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지요. 나는 언제나 술 마실 자격만 충분한 사람이에요.
장재선 : 최근 기획예산위에서 문예진흥기금 폐지 문제를 들고 나와서 문화인들이 반발하고 있는데요?
고 은 :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입이 열리지 않는다고 쓰면 될 거에요. 깊이 연구해서 잘 알게 될 때 의견을 발표하게 될 거에요.
장재선 : 94년에 『백두산』을 끝내시면서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근현대문학의 자식이긴 하지만 그를 극복하는 반항적 자식이고 싶다는 말씀이셨는데, 이것은 문학의 본질과 관련하여 후학들에게 엄청난 굉음으로 들려옵니다. 이 세기말에 문학을 하는 사람, 시를 쓴다는 사람들이 어떤 정신적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지요?
고 은 : 문학은 질서가 아닌 카오스를 먹고 살아요. 더러운 곳에서 가까스로 피워내는 꽃이지. 고통, 추악, 선악의 갈등, 암흑 속에 문학이 필요한 것이지. 낙원에는 문학이 필요 없어. 혼돈이야말로 문학인에게 천국이에요. 문학은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어요. 다만 지금 문학인들이 지금 상황을 고도의 정신에 의해 제대로 형상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아요. 나를 포함해서 가혹한 질책을 받을 사람이 적지 않아요.
(여기서 기자는 시인께서 「어느 젊은 시인에게」내렸던 苦言을 번뜩 떠올렸다. '젊은 시인아 나는 네 발 밑에 있다 / 네가 디딘 땅이야말로 / 지나간 세월의 시인들이고 거기에 나도 있다 / 이제 네 시를 써라 / 어제의 시가 아니라 / 내일의 시가 아니라 / 네 시를 써라' )
장재선 : 세계화란 막연한 명제 속에서 우리의 고유성, 정체성 상실의 위기감이 팽배해 있습니다. 경제 분야 뿐만 아니라 문화 분야에서 더 심각합니다. 일본문화개방이 그렇고, 영화계 스크린 폐지 논란이 그렇습니다. 영어공용어 논쟁이 상징하듯이 '민족'을 앞세운 기치가 날로 빛바래가고 있습니다.
고 은 : 동북아시아는 100년동안 근대화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서구와 만나는 경험을 했어요. 지금 우리는 전통 가치만으로 삶의 내용을 담을 수 없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서 보듯 생활이 이미 서구적이예요. 전통적 의미에서 민족적 자아라는 기존의 관념은 없어졌어. 이제 근대화 토대 위에서 새로운 전통과 민족에 대한 개념 형성이 필요한 거지. 세계와 냉철한 관계를 만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객관성인데, 우리는 그간 가치가 투명하지 못해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했어. 우리 생활의 장부 하나를 투명하게 만들지 못해 언제나 검은 장부의 역사를 만든 거야. 삶의 기본인 장부가 검었으니 거품이 생겨난 거지. 2중, 3중 장부 만드는 카멜레온의 가치로는 세계와 대응하지 못해. 이 거품을 벗고 자기 실체로 돌아가는 시기가 우리에게는 있어야 했어요. 지금 우리 국민이 겪는 고통은 가까이로는 너무 수고로운 거지만 멀리로는 정말 필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장재선 : 85년부터 펴내시기 시작한 『만인보』의 10~12권이 96년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정치, 문화, 종교계를 망라한 거대한 인간희곡이라는 세평을 얻었는데요, 요즘도 계속 쓰고 계십니까?ㅣ 전 30권 3천 5백명 선에서 마무리하시겠다는 수정목표는 변함없는지요?
고 은 : 『만인보』는 15권까지 썼어. 출판기념회에는 김대통령이 오셔서 축사도 해 주시고 했는데, 계속 쓰지 못하고 있어. 작년에 못 썼고 올해 써야 하는데 역시 시간이 모자라. 신문 같은데 글을 쓰니까 시간이 없어. 만인에 대한 노래라는 애초 목표를 고집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3천 5백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이 때 동석한 동인 중의 한 사람이 『만인보』 13권을 꺼내들고 사인을 청했다. 시에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그의 인척이라는 말에 시인은 반색을 하며 그 등장인물의 안부를 물으셨다. 기자도 80년대 초반에 사서 감명 깊게 읽었던 에세이집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를 꺼내 사인을 받았다. 시인께서는 글씨를 잘 못 쓰신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지만, 호방하면서도 예술적인 기품이 풍겨나는 서명을 낡은 책에 남겨 주셨다.)
만인보에 사인을 받은 동인의 질문 : 선생님을 뵈니까 너무 건강해 보이십니다. 에너지가 폭발할 듯이 넘쳐 보입니다. 그것을 다스리시는 특별한 비결은 있으신가요? 건강을 위해 무얼 하시나요?
고 은 : 특별한 것은 없어. 들길을 30분 정도 걷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무엇보다 이 술만 조심하면 되는데 ….
장재선 : 모 일간지에 「시가 있는 아침」을 매일 연재하고 계신데 우리 나라의 젊은 시인들 작품까지 읽고 계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시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며 후배 시인 중에 주목할 만한 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 은 : 그 동안 아주 오만했어. 남의 시를 거의 안 읽었지. 거기 뭐 있겠어, 하는 심정이었는데 이제 뉘우치는 거야. 다른 시세계를 부정하거나 경멸한다는 것을 어느날 반성하게 된 거지. 이 시대가 시적인 것은 있으나 시와 멀어지는 세태를 가지게 됐는데 그것은 시인인 내게도 책임이 있는 거야. 궂은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옛날처럼 요즘에도 똑같이 슬픈 정서를 가지지만 그것을 고도의 정신으로 응축한 시로부터는 멀어진 거지. 컴퓨터 문명 때문이기도 하고 TV 영향도 있을 것인데 인간이 본성을 잃어간다는 의미야. 나는 40년간 시를 써 온 사람으로 다른 이들에게 시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고 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거지.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야. 벌써 책으로 묶자고 서로 덤벼들고 있어. (시인은 소년처럼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질 문 (지금까지 기자가 가지고 간 『문예2000』을 들여다보거나 인터뷰를 경청하고 있던 출판사의 편집장이 시인께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선생님이 생각한 것을 신문사가 받아들인 건가요? 아니면 그 쪽에서 그런 기획을 가지고 있다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건가요?
고 은 : 그건 술 먹다가 서로 의견이 맞아떨어진 거야. 우리도 술 계속 같이 먹으면 문학의 역사가 이뤄지는 거지.
장재선 : 또 다른 일간지에서 문학평론가들에게 부탁해 정부수립 이후 우리 국민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친 시인 50인을 선정한 바 있습니다. 그 작업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고은 시인께서 그 최상 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 그룹에 김수영, 서정주, 신경림 시인께서 더불어 계셨는데 그 분들의 시세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해 주시면 후학들에게 큰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고 은 : 신문에 그런 일이 보도됐는지 나는 몰랐어. 그런데 시인이라는 호칭밖에 모르나? 선생님이라고 부를 줄 모르나. 북에서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데…. (시인께서는 이 말씀을 弄半眞半으로 던지셨겠지만, 기자는 그 眞半의 무게로 인하여 당혹했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세간에서 너무 남용되지 않느냐고 변명을 흘리면서도 시인의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이로써 기자는 시인이라는 지상최대의 경칭을 포기해야 했다.)
장재선 : 미당 서정주 시인께서 선생님을 문단에 추천하셨는데 두 분이 걸어오신 길은 서로 달랐다는 것이 세간의 평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고 은 : …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장재선 :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꿰뚫는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의 길을 밝히는 이 시대의 탁월한 산문가이신데, 그 두 장르의 정서적인 간극을 어떻게 메우십니까?
고 은 : 내가 쓴 소설에 언제나 절망해. 시에 더 그랬으면 좋겠는데 절망이 모자라. 운문과 산문의 간극, 이건 문학개론적인 이야긴데 서술한다는 기능으로만 보면 산문 양식이 나의 본능에 더 적절해. 일찍부터 닦았으면 꼴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내 생애가 시적인 거였어. 산문을 감당할 만한 질서가 없었어. 비약이 심했고 원인 불분명한 변화가 극심했어. 시적으로밖에 담아낼 길이 없었어. 나이 들면 질서가 생길 지도 모르지.
장재선 : 집필실에 책상이 여러 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고 은 : 지금 현재 4개가 있어. 각기 다른 것을 쓰기 위해서지. 연표 같은 참고 자료가 다르니까 자꾸 늘어나. 줄이려고 애쓰지.
질 문 (이때 출판사의 편집장이 나서) : 선생님 원고를 받아보면 놀래요. 신문 광고지 이면지에 시를 쓰시는데요, 그게 그렇게 운치 있을 수가 없어요. 열정이 묻어나는 원고를 그대로 책으로 묶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고 은 : 이런 이야기는 모르고 왔지? 여기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데….( 시인께서는 비밀을 감추려는 아이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셨고, 기자는 인터뷰 준비를 위해 애쓴 시간을 들먹이며 말씀을 재촉했다.) 서울서 더 심하지만 우리 시골에도 신문에 광고지가 많이 끼어 들어와요. 내가 뭐 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광고지의 빈 공간을 보면 행복하잖아. 광고지 공백이 좋아서 글씨도 잘 써져. (시인께서는 오늘 스케줄을 적어온 광고지 이면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이걸 갱지라고 그러나, 펜이 아주 잘 나가요.
장재선 : 그러면 모든 원고는 아직도 육필로 쓰시나요?
고 은 : 그래, 아직 그렇게 하고 있지.
장재선 : 소설 장르에서도 치열한 정신의 흔적들을 우리 문학사에 선물하셨습니다. 크게 보아 자전류와 불교의 구도소설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후자는 『화엄경』,『선』,『뭐냐』로 대표되는데 그런 작품세계에 더 천착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고 은 : 소설은 내년에 쓸려고 해. 지금 머리 속에만 구상되어 있지. 뭐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 불교를 다루는 것은 아니야.(이 때 이르러 시인께서 '목을 축이시던' 와인이 병 속에서 그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고, 시간은 다른 약속 장소로 가시기 위해 일어나시기로 하셨던 오후 4시를 성큼 지나 있었다.)
장재선 : 그러면 여기서 인터뷰를 접도록 하겠습니다. 바쁜 시간 내주셔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인께서는 와인 병을 들어서 동석했던 동인들의 맥주 잔에 조금씩 따루어 주셨다. 떠들썩한 흥감 속에서 동인들 중 누군가 따님의 안부를 여쭈었다. 그러자 시인의 눈가에 미소가 다시 잔잔히 번졌다.)
고 은 : 차령이가 지금 중학 1년생인데 공부를 안 해서 걱정이야. 악기 다루고 하는 것은 취미가 있는 것 같은데 …. 아마 당신 머리를 닮은 모양이라고, 부부간에 서로 농을 던지곤 하지.
장재선 : 83년에 이상화 교수님과 결혼하실 때 함석헌 선생님이 주례를 보셨다고 하던데요. 안성 장미골집에 지금도 살고 계신 거지요?
고 은 : 신학자 안병무 선생 댁에서 식을 올렸어. 안성 집은 이문영 교수가 어느 날 그 터를 보고 와서, 고은 선생 살 집으로 하나님이 마련한 곳을 방금 보고 왔다고 해서 내게 온 거지. 이문영 교수 말씀이 얼마나 아름다워. 안성서 사는 거 행복해.
(시인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때에야 동인 중 한 사람이 기념촬영을 잊었다는 걸 일깨워줬다. 혼을 사로잡는 노래를 들으면 박수를 잊는다더니 …. 기자의 넋두리에 시인께서는 소탈하게 웃으시며 다시 자리에 앉아 사진기를 향해 포즈를 취해주셨다.)
고은 시인께서 거리로 다시 나가 휘적휘적 걸어가시는 모습을 멀리서 보며 우주라는 말이 시인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고 누군가 감탄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 저어기, 우리 시대의 우주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짧은 시간의 만남을 통해 그런 우주를 다 읽고자 하는 것은 만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술가의 시대적 사명에 대해 터질 듯이 이글대는 용광로의 열변을 토하다가도 입신양명과 같은 세상사를 초개로 돌려버리는 그 광활한 정신의 영토를 조금이나마 엿본 것은 전율로 얻은 소득이다.
이미 100여권의 저서를 내시고도 『아직 가지 않은 길』을 찾아 『내일의 노래』를 꿈꾸는 65세의 청년시인. 이제 곧 『속삭임』을 펴내신다니, 거기서 우리는 다시 보게 될 것을 믿는다. '이제 온갖 잡동사니 싸잡기보다 /몇가지만을 오롯이 드높여 솟아올라 /깊은 바다 밑 / 눈부신 말미잘까지 / 흥겹게 노니는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