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폐쇄, 회로」
- 판옵티콘의 세계, 독자는 작가의 감시자이다
문예창작학과 김민구
인간은 스스로의 모습을 완벽하게 살펴볼 수 없다. 몸을 돌리지 않고선 오직 사람의 눈은 정면만을 바라볼 수 있으며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때 그 동작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거리를 걷거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혹은 집에서 밥을 먹거나 미술관에 가서 전시품들을 감상할 때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의 시선과 전봇대 위에 매달린 폐쇄회로카메라(CCTV)의 렌즈는 늘 우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낱낱이 살피거나 훑어보고 있다.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한 작가 이호는 폐쇄회로카메라의 시선을 통하여 한 연고 없는 경비원의 일상을 마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추적하는 감시자처럼 꼼꼼하게 진술해내고 있다. 소설가가 자신의 등장인물에 대한 감시자 노릇을 자처했듯이, 독자 역시 옵저버(Observer)가 되어 소설가의 문체와 이야기에 대하여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후 나는 「폐쇄, 회로」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먼저 제목이 ‘폐쇄, 회로’인데 이는 작중 관찰자가 사람이 아니라 CCTV인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더불어 몸을 간신히 누일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하루를 보내는 경비원의 모습을 마치 갇혀있다는 뜻의 ‘폐쇄’라고 설명하면서 마치 회로처럼 어지럽게 얽혀 좀처럼 풀어낼 수 없이 그저 한 곳에 묶인 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의 상황을 반증해주고 있다. 제목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풀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으며 의미에 대한 물음이 해소되었을 때 그 이상의 여운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폐쇄회로카메라의 영문표기법이 CCTV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작품의 이야기 순서를 나누고 있는 구획을 모두 ‘CAM 001’등으로 만들어놓았으므로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너무도 쉽게 이해되어버리고 있다. 그의 하루는 마치 판에 박힌 것처럼 같은 일과로 반복된다. 이는 전기신호를 송출하거나 작동시키는 제품의 회로가 맡는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주인공을 등장시켜두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행동으로 하루를 보내는지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다. 이때 작가의 눈은 CCTV의 렌즈로 표상될 수 있겠지만 실은 어차피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씌어졌으므로 어떤 파격적인 소설적 장치로서의 메리트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 구광본 소설가도「맘모스 편의점」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을 사용한 바 있었으므로 작술 형식이 파격적이거나 새롭다는 생각은 곧잘 다가오지 않았다. 카메라를 하나의 자의식이 있는 존재로 상징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는 감시자이자 작가의 시선 그 이상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쉬웠다.
경비원인 ‘그’는 어느 날 아침 주차 위반 딱지를 붙인 차의 주인과 갈등을 빚는다. 이때 지문에서 할애된 대화는 열두 번이며 대화체의 특성 상 진술과 묘사로 이루어진 지시문이 배제되므로 반복되는 대화로 인해 발생하는 이야기 구성의 공백은 점점 더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주인공의 하루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지 않고 그저 배경이나 변두리에 자리할 뿐이다. 주차 관리를 하는 사람은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시설 이용객들과 마찰을 겪는데 고작 주차 위반 딱지를 붙여놓은 것으로 어떤 민원인과 싸운 이야기는 오히려 주인공의 내면을 더 공소하게 만드는 것으로 안 좋게 작용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단편소설에서 많은 대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분량도 적은 편이라 자칫 작은 장면에 많은 대화를 할애하면 전체적으로 너무 수월하게 읽힐 위험이 있기 때문인데 작가가 가독성의 문제를 속도에만 치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게다가 「폐쇄, 회로」에서 독자들은 치밀하게 짜여진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묘사보다는 경비원이 살아가는 일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진술적 문장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마치 도입부에서 사소한 사건을 설명하는 일에 대화를 모두 소진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사실상 전무하다보니 그저 주인공의 내면만을 줄곧 기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과연 이런 시도가 옳은 것인지조차 나에겐 의문으로 남았다. 하루 종일 지극히 좁은 공간에 갇혀 경비원으로서의 일을 하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미술관에서 먼 나라의 사진들을 본다. 그 사진들은 모두 주인공의 내면을 반증하는 이미지인 절망, 슬픔, 고독, 괴로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전쟁터에서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아이의 사진이 그렇다. 주인공은 어디론가 떠날 의지 자체를 상실해버린 채 세상 어디에도 자신을 고독의 방으로부터 해방시킬 세계나 인도해줄 표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시된 미술품들은 그저 황량한 벽에 걸려있기만 할 뿐 주인공에게 활력을 되찾아줄 방법을 지시하지 않는다. 자신이 경비실에서 CCTV로 동향을 살피는 감시자이자 작은 의미의 지배자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허락된 영토는 오직 작은 공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는 문 밖에 나선 순간 거리와 건물에 장치되어 있는 CCTV의 감시를 받으며 또한 고유한 정신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꿈에서까지 작가의 시선과 웬 도깨비들의 농락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그의 힘이 닿는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오직 그 앞에 실존할 수 있는 것은 작게 뭉쳐진 눈사람이지만 그것마저도 곧 녹아 없어질 실중유허(實中有虛)의 존재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를 작은 방 안에 유폐시킨 후 관망만 하고 있을 뿐이다. 가령 CCTV가 범죄 과정을 녹화한다고 해도 카메라로서는 범인을 멈출 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차장에 멈춰선 장의차를 보는 장면에서 그의 무기력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상복들과 관을 실은 차가 천천히 아파트를 빠져나가고 방금까지 버스가 서 있던 그 자리에 우울한 잔상이 남았다’라는 문장이 그렇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완성하는 절차를 바꾸거나 돌이킬 수 없다. 그저 눈으로 삶을 관찰할 뿐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이들의 목격자이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을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을 대행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폐쇄, 회로」는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경비원인 주인공이 마치 카메라의 렌즈에 비친 피사체처럼 그려지면서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감시받는 인간들의 내면을 위태롭고 불안하면서도 세밀한 진술기법으로 독자들에게 내보이고 있다. 우리는 생을 목격하지만 순간을 기억하는 존재이므로 타인의 인생을 진술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삶이라는 작은 틀 속에 갇혀 자기 외부에서 살아가는 것들을 관찰하는 존재이고 때론 그들을 감시하는 옵저버가 되어, 혹은 거꾸로 감시 받는 피사물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이번 당선작 속에 함유된 의미였다. 그러나 작가가 파트를 나누면서 CAM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면 이것이 카메라에 비친 피사체로서의 주인공을 다룬 것인지 모를 정도로 진술하는 주체의 형식에 있어서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또한 한 명밖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세상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일은 무척 어렵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있어 작가가 이야기를 구축하지 않고 그저 단일대상의 내면만을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는 팩트 뒤에 숨어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에게 듣지 않아도 삶을 살다보면 체득하게 되는 이미지들은 독자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았다. 경비원의 초라한 하루 자체만으로 작품 전반이 할애되는 것에 동의할 사람들이 많을지 확신할 수 없다. 폐쇄된 자아, 해방의지가 상실된 어느 늙은 경비원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묘사가 거의 배제된 진술, 생동이 결여된 문체로 인하여 수백 편의 응모작 중 으뜸으로 선정하기엔 장점보다는 부족한 부분이 더 많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