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멩 가리의 작품세계 - 김민구
1. 로멩가리
로멩 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 유태계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도 유명한 이 위대한 문학의 천재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세계2차대전 중 로렌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해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 수여되었다. 참전 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1945년 비평가상을 수상하여 작가적 명성을 얻었으며 <하늘의 뿌리>로 1956년 콩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번 콩쿠르 상을 수상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다. 시대정신과 풍속 묘사로 현대성의 퇴폐를 창작으로 고발하기도 했던 그는 1980년 12월 2일 파리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주요 작품으론 <하늘의 뿌리>, <새벽의 약속>, <장지스콘의 댄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이 있다.
2. 로멩가리의 작품세계
A.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
수많은 새들이 페루의 어느 섬 해변가에 죽어 있다. 그 새들은 먼 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음을 맞이한다. 시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분명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이 섬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자크 레니에는 어느 날 파도를 향해 달려드는 한 여인을 구출한다. 사육제를 기념하는 축제 동안 어느 남성들에게 능욕을 당한 그녀는 자괴감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던 것인데, 그녀를 욕보인 남성들은 어떠한 양심의 가책 없이 술에 취하여 해변에서 쉬고 있다. 그녀는 자크에게 카페에서 머물러도 되냐고 묻고 그는 허락하는데 갑자기 그녀의 남편이 나타난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국의 노신사처럼 보이는 남편은 정신이상적인 여자들을 치료한 교수에게 같이 가보자며 자신은 어떠한 사랑의 방식도 충족시켜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 둘이 떠난 해변엔 아무도 없고, 자크는 새들이 왜 이곳에 와서 죽는가를 고뇌한다. 설명되어질 수 없는 캐릭터의 등장과 새들의 죽음을 이루는 다소 몽환적인 장소에서 단지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일뿐인 주인공이 어느 날 자신에게 일어난 사소한 일을 기술한 작품이다. 철저하게 고독한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문장들이 주인공 스스로의 인격체를 정립함과 동시에 상처입어 언제라도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가련한 새인 여자를 위로하고 보듬는 아름다운 기록이라 할 것이다.
B. 류트 (Le luth)
외교관인 N백작은 자신이 부임한 곳의 풍물시장을 자주 들러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오래된 골동품들을 찾기를 좋아한다. 보기에는 분명 섬세한 장인의 손끝에서 빚어진 작품이지만 그를 완벽하게 매료시키기엔 부족하다. 어느 날 골동품 가게인 아흐메드 상점에서 그는 류트라는 악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매하려 하지만 주인 아흐메드는 선선히 류트를 선물해준다. 그것은 류트라기보단 아랍어로 ‘우드’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악기였다. N백작이 우드를 만지는 데에 신경을 쏟자 그의 부인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N백작은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 아흐메드의 조카에게 개인 교습을 받는다. N백작의 부인은 물론 백작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남다른 애정을 타인이 알아채지 못하게 스스로 조심해온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이 멋진 외교관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한 기대와는 반대로 N백작은 우드 연주에 대한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예술이 주는 감각적이고도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단편 <류트>는 타인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남편을 향한 애정과 갈망, 그리고 남들이 경탄할 만한 길을 걸어왔으나 문득 예술이라는 방법으로 완벽함에 다가가고자 애쓰는 N백작의 노력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이 되겠다.
C. 어떤 휴머니스트 (Un humaniste)
독일 나치의 히틀러가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모든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어 남김없이 없애기 위해 여러 정책으로 억압하려는 상황 앞에서, 장난감 공장 사장이자 인간이 가진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휴머니즘(인간애)을 다른 무엇보다 신뢰하는 칼 뢰비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운 소설이다. 칼 뢰비는 나치로부터 폭력을 당하면서도 언젠가는 인간애가 승리할 것임을, 사랑과 배려로 이루어진 휴머니즘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결코 허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날이 오기를 확신하고 있다. 그에게는 충직한 하인인 슈츠 부부가 있는데, 칼은 슈츠에게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전해주며 오래도록 교감해온 관계를 갖고 있다. 어느 날 칼은 자신의 물건들을 지하실로 옮기고 슈츠 부부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사회로부터 완벽히 단절된 삶을 시작한다. 바깥 소식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그는 결코 자신의 생각을 저버리지 않았다. 히틀러가 몰락한 다음에도 그는 슈츠 부부의 애정 가득한 헌신을 받으며 여생을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히틀러가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완벽히 자신을 낙관론으로 보호한 채, 그는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 작품은 칼 뢰비를 지칭하여 ‘어떤 휴머니스트’리고 하여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낙관을 잃지 않는 인간의 생을 짧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슈츠 부부는 헌신과 사랑을 가장한 허위의식으로 인해 히틀러의 몰락 이후 자신들이 경영한 장난감 회사가 훨씬 발전했는데도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로멩 가리의 사회 고발과 진실 속에 감추어진 허위를 드러낸 작품인 것이다.
D. 몰락 (Decadence)
노동조합의 주요 인물들은 로마로 가기 위한 비행기에 탑승해 있다. 동승한 노동운동가 카를로스는 자신들이 일구어낸 노동의 찬란한 역사와 가치에 대하여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자신들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 자들을 잡아다 산 채로 다 굳지 않은 시멘트 속에 던져 넣어 살해하곤 했던 과거조차 아무 여과 없이 토해낸다. 그들과 같은 노동운동가의 선구자적 인물인 마이크를 만난 로마에서 카를로스는 사람의 신체에 시멘트를 발라 부조처럼 만들어놓은 작품들을 보고 경악하여 서로 갈등한다. 마이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전시회를 가질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과대망상증과 자만심에 도취된 마이크에게 카를로스와 그의 경호원 쉬미 쿠니츠가 동시에 방아쇠를 당겨 쏘아 죽인다. 결국 마이크를 시멘트에 넣어 만든 조각품은 모든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걸작이 되었다. 노동조합의 역사적 인물로서는 죽어서까지 자리매김한 셈이지만, 그 개인적인 문제로 보았을 때 마이크는 몰락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제목도 ‘몰락’이라 지은 듯하다.
E. 가짜 (Le faux)
반 고흐 그림을 비싼 값에 사들인 바레타에게 S는 당신이 산 작품은 가짜라며 신랄하게 비난한다. S는 미술품의 진위 여부를 확실히 가려내어 공표하지 않으면 후대의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인 것으로 믿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진본이 아닌 사본을 비싼 값에 사들인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일에 대하여 어떤 사명감과 고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거액을 희사하여 입을 막으려는 데 실패한 바레타는 S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며 문을 나선다. S에겐 알피에라라는 스물두 살 연하의 아름다운 아내가 있는데, 어느 날 바레타는 S에게 알피에라의 성형수술 전 사진을 편지로 보낸다. 당신 아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실은 조작된 가짜라는 것이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인해 S는 아내와 이혼하고 완전한 진본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 이 작품은 남의 것이 아니라 당장 내 것이 실은 가짜이며 조작된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어떠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진실을 밝히는 데에 힘을 기울인 S는 아름다운 아내가 실은 성영외과 의사에 의한 조작된 작품이라는 것에 분개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진실과 거짓의 상관관계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F. 본능의 기쁨 (Les joies de la nature)
추운 겨울날 어느 의사가 서커스단 트레일러의 문을 두드린다. 서커스단의 단장은 자신이 배우로 고용한 거인의 증상을 보아달라고 부탁한다. 그 난쟁이 단장은 거인이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병에 걸렸으며 경쟁 서커스단의 예쁜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병적으로 크게 이야기한다. 그 서커스단 단장은 거인을 거의 무조건 불신하고 있으며 거인이 갖고 있는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존중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의사는 단순한 감기에 걸린 탓이라고 진단하는데 그 거인이 사랑하는 여자아이가 트레일러의 문을 열고 나타나 거인에게 ‘원하는 것을 실행할 자유’가 있다며 결국 병든 난쟁이를 내버려둔 채 둘은 밖으로 나간다. 로멩 가리의 단편 제목은 추상적인 것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본능의 기쁨에서 비롯하는 것이란 말일까? 확연하게 이해되지 않는 작품이다.
G. 고상함과 위대함 (Noblesse et grandeur)
갈등이나 싸움, 더 나아가 전쟁은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끝까지 지키고 완수한다는 미명 아래 죽음을 수반할 것을 요구한다. 이 단편소설은 온갖 싸움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젊은이들-은 왜, 무엇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전쟁에 내몰리는가. 호쾌한 죽음? 위대한 국가를 향한 대의? 그것은 전쟁을 포장한 고상함과 위대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결과는 총을 맞고 서서히 죽어가는 코프의 마지막 대사처럼 ‘쓰레기’에 불과하다. 명분 같은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는 얘기다. 고상함과 위대함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시대고발적인 측면에서 다루어낸 작품이다.
H. 비둘기 시민 (Citoyen Pigeon)
1932년 작중 인물인 ‘나’는 동료 라쿠센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뉴욕증시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은 그들은 조용한 곳에서 생활해야한다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온 것이다. 소련-그 당시-의 현금 가치와 새로운 주식에 대한 기대도 그 행로에 한 몫 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모스크바엔 새로운 인간-비둘기-이 존재한다. ‘나’와 라쿠센은 비둘기가 마차를 모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취했기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나라에 적용되는 증시가 남의 나라에서도 존재해야만 한다고 믿는 개인주의적 의식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 아집으로 가득한 개인의 시선은 죽은 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I. 벽,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Le mur (Simple conte de Noel) )
친구이자 의사인 레이에게 ‘나’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떠오르던 영감들이 이젠 자취를 감추어 마치 자기 스스로가 커다란 벽을 마주보고 있는 듯한 허망함에 빠질 때가 많다며 적당한 약을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친구 레이는 옛날 실베스트로 축제일(12월31일)에 왕진을 갔던 때의 이야기를 해준다. 어느 건물에서 남학생이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어 가보니 유서가 한 장 있었는데, 그것은 사망한 남학생 자신이 목을 매기 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설명으로서 고독의 발작으로 인한 것으로 보였다. 유서에 따르면 남학생이 사는 방 바로 옆에는 아름다운 여신과 같은 미모의 처녀가 살았는데, 자신이 슬픔과 고뇌에 휩싸여 절망하고 있는 동안 벽 건너편에선 침대를 삐걱이게 만들 정도의 소리-아마도 정사라고 생각했던 듯하다-가 들려와 분노와 경멸이 치밀어 목을 매었다는 것이다. 의사 레이가 자살의 원인인 여자를 찾으러 방을 두드리자 기척이 없어 주인 여자가 달려와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목 매어 자살한 남학생이 완벽히 오해를 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여자는 매혹적인 정사로 인해 신음소리를 냈던 것이 아니라 비소 중독으로 인해 죽어가는 도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가 죽은 이유를 총체적인 삶에 대한 혐오감으로 진단한다. 레이는 친구에게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보라 말한다. 이 작품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단절을 고발한 작품임과 동시에 사회 전반을 이루고 있는 젊은이들의 탄식과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
J.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Tout va bien sur le Kilimandjaro)
마르세유에서 십 킬로미터 떨어진 튜샤크라는 작은 도시의 중앙 광장엔 위대한 탐험가 알베르 메지그를 기리는 청동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를 위한 박물관은 없으나 시청의 특별실엔 그 탐험가의 기념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고향사람들에게 보낸 천여 장의 엽서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오욕으로 점철된 삶을 다루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반전을 갖는다. 퓌졸 경관이 간행한 <마르세유의 추억>에서 알베르의 죽음이 나타나는데, 그의 손에 들려진 한 장의 편지가 이 단편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알베르가 매번 보낸 엽서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어머니가 앓고 있던 관절염을 걱정하는 글이 씌어있었는데, 시체의 손에 들린 편지에 그 여인은 이미 20여년 전에 어떤 이발사와 결혼했으며 아들을 일곱 명이나 낳았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으니 이름을 바꾸어달라는 자신을 남편이 말리며 자신의 남편이 장미꽃 우표를 너무 갖고 싶어하니 빨리 보내달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전설로 남은 탐험가의 생을 기만하는 내용이며 한 사람을 향하는 사랑의 허위를 잘 고발한 작품이다.
K.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Je parle de I'heroisme)
어느 강연회에서 ‘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호흡 장비를 시연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그는 강연에서 영웅적 행위란 최후의 죽음에 순간에서도 끝까지 기지를 발휘하여 항구적인 가치들을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던 바 있다. 그러나 직접 영웅적 행위를 하도록 내몰리자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선 영웅적인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시연을 무사히 넘긴 뒤 다시 ‘나’는 영웅적 행위에 대한 이론적인 감상과 의지를 한 치의 반성도 없이 피력한다. 이것 역시 허위의식을 고발한 작품이 되겠다.
L. 지상의 주민들 (Les habitants de la Terre)
한 사내와 여인이 추운 눈밭을 걸어가고 있다. 그 여인은 군인들에게 겁탈을 당한 충격으로 실명을 한 상태다. 사내는 여인을 함부르크에 스테른 박사에게 데려가 치료받게 하기 위해 함부르크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 트럭에 히치하이킹을 성공하여 탑승하자 사내는 자신과 여인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며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사연들을 일방적으로 토해낸다. 달리던 트럭을 갑자기 세운 운전수는 강압적으로 당장 내리라고 명령한다. 소극적인 사내는 여인을 데리고 내린 뒤 그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나 트럭은 당장 사라지고 만다. 사내는 펄펄 쏟아지는 눈을 맞고 있는 신호등을 바라보며 경악한다. 트럭은 함부르크와 정반대 방향으로 왔던 것이다. 희망을 찾아가는 상처입은 자에게 운명은 겨울날처럼 혹독하다. 그들은 아무런 인정도 베풀어주지 못하는, 소위 인간성이 파괴된 곳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지상의 주민들’인 것이다.
M.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J'ai soif d'innocence)
'나‘는 순수에 목말라 있다. 이익을 위한 싸움에 시달려 물질에서 벗어나 순수를 찾으려는 ’나‘에게 타라통가라는 사람이 호두과자를 선물하는데, ’나‘는 그 과자랄 싼 천이 분명 폴 고갱의 그림이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게다가 그런 그림들을 뭉치로 가지고 있는 타라통가가 모두 가져가도 좋다며 선뜻 내놓는 것이 아닌가. 그는 최소한의 순수를 지키고 싶어 자신이 가진 모든 값나가는 것을 억지로 타라통가에게 넘겨주곤 그림들을 챙긴다. 어느 날 타라통가는 어느 여자 이야기를 해주며 놀라운 솜씨로 고갱의 작품을 모사한다는 얘기를 해준다. ’나‘는 또 한번 순수에 기만당했음을 알고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생각한다. 세상은 ’다시 한번 그를 배신‘했던 것이다. 세상을 이루고 있던 순수와 숭고한 정신적 가치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얻기 위해 들이는 수고로움도 사실 어느 순간 기만당할 때가 올 수 있음을 말하는 작품이다.
N.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La plus vielle histoire du monde)
순혈주의를 표방한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의 일환에 휘말려 쇼넨바움은 독일 토렌베르크의 수용소에서 2년을 갇혀 지내다 미군이 진주하여 그는 볼리비아의 라 파스라는 언덕에 재봉 가게를 내고 살고 있다. 그는 우연히 친구 글루크만을 만나 인사하는데, 친구는 화들짝 놀라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글루크만은 아직 나치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줄 알고 있으며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게다가 글루크만은 자신을 수용소에서 고문하고 학대한 나치군 간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있다. 이 광경을 보고 쇼넨바움은 그를 힐난하며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지만 글루크만은 태연히 미소지으며 ‘그가 다음에는 잘 봐주기로 약속했다네!’라고 말한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사건이 인간의 순수한 영혼을 삽시간에 붕괴시키며, 그 상처는 깨닫기 전까지 무한히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이상 자신을 잡아 끌고가려는 것이 없음에도 억압과 불안을 느끼는 자아를 드러낸 단편이다.
O.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Gloire a nos illustres pionniers)
이 작품은 또 한 번의 진화를 꿈꾸는 인류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바야흐로 진화의 선두에 선 인간들이 인류의 새로운 국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인류는 더 이상 직립보행하거나 이목구비가 달린 육체가 아니라 집게발이나 소화관, 비늘들을 몸에 가진 또 하나의 종족으로 나아간다. 대통령은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며 소리치고 개선로의 테이프를 끊는다. 모든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이것은 하나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미래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로맹 가리가 바라본 세상은 그만큼 부조리했고 치유될 수 없는 삶으로 가득했다. 차라리 하나의 종족을 새로 창조하여 그들의 삶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제일 나은 치료법이 될 만큼. 이렇듯 모든 로맹 가리의 단편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부조리와 절망을 고발하는 목적으로 씌어졌다.
P. 새벽의 약속 (La promesse de l'aube)
<새벽의 약속>은 로맹 가리가 쓴 자신의 삶의 기록이자 한 편의 자서전이면서 어머니를 위해 바치는 아름다운 사모곡이 될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위대한 작가나 외교관, 예술가, 혹은 군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으며 항상 아들의 선전을 기대하는 조력자로서 존재한다. 아들이 절망하거나 실패하면 같이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이곤 한다. 유년기였던 로맹 가리에게 어머니는 유명한 사람들에 빗대어 자신의 자식이 그들의 뒤를 이을 것이라 확신을 하고 살아간 인물이었다. 로맹 가리는 시를 쓰기도 하고 음악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엔 공군사관후보생이 되어 군인으로 살아간다. 모스크바 유태인에서 프랑스로 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군 장교 임관이 불가능하여 소위가 아닌 하사로 임관했다가 시간이 흘러 소위로 재임관된다. 그 후 프랑스에서 주는 수많은 훈장들을 수여받고 자랑스러운 군인이 된다. 그의 모친이 바랐던 것과 같이 그는 군에서 제대한 후에 프랑스 총영사를 지냈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고귀함의 상징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수훈자로 임명되었고 프랑스 콩쿠르 문학상을 두 차례나 받아 문명을 떨쳤다. 그는 독일군과 싸워 돌아온 날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작품 구상에 몰두하고 책을 펴낸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흥한다는 것이기 보다는 어머니와 유년기에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공군에서 대위로 전역한 로맹은 어머니에게 보여줄 자신의 책과 서평과 명예 훈장들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이미 모친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자신 앞으로 보내진 편지는 사실 어머니가 미리 써서 스위스의 친구에게 남겨놓은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빅서 해안에 누워 그간의 삶을 회상한다. <새벽의 약속>은 프랑스의 대문호 로맹 가리의 유년기에서 어머니가 부재한 마흔 여섯까지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는 커다란 상실감과 우울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번역된 문장이지만 실로 아름다운 기록으로 남은 <새벽의 약속>은 작가 자신의 과거를 썼다는 점에서 어떠한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 작품임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