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작품론 - 김민구
재작년 겨울, 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기웃거리다 표지가 떨어져나가 테이프로 간신히 붙여놓은 작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페이지들이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글자도 세로쓰기가 되어 있어 무척 오래된 책이라는 것을 직감케 했다.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그의 또다른 단편이자 문단 데뷔작인 <새하곡>이 실려 있는 책이었다. 나는 이문열의 초기작을 읽어본다는 마음보다는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 책을 오랜만에 접하였다는 반가움으로 <사람의 아들>을 읽기 시작했다.
<사람의 아들>은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공존하는 액자식 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남 경사가 민요섭의 살해 현장을 수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와 민요섭의 노트에서 발견한 아하스 페르쯔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진전과 예수와의 만남을 알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 하나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민요섭이라는 사람이 칼에 찔린 채 시체로 발견된다. 이를 수사하던 남 경사는 민요섭이 한때 신학대학을 다니며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는 걸 알게 되고 민요섭의 노트에서 아하스 페르쯔라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아하스 페르쯔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의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리스도 자체를 경멸했던 인물인데, 민요섭은 아하스 페르쯔의 사상에 빠져 기독교의 교리와 멀어졌고 사랑과 처벌을 주는 양면적인 신의 모습이 아니라, 오직 사랑만을 주고 결코 걱정이나 두려움을 가질 상황 자체를 배제시켜주는, 언제나 한 모습뿐인 신을 찾아 갈망하게 된다. 이것은 민요섭이 예수와 아하스 페르쯔 사이에서 갈등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민요섭의 노트에서 보여지는 관점으로는 예수와 아하스 페르쯔 둘 사이의 대립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과 선심은 인간의 잘잘못을 구별하지 못한 채 아무런 느낌도 없는 환멸을 가져온다는 걸 깨달은 민요섭은 자신을 따르던 조동팔이라는 학생에게 살해되고 경찰이 그의 집을 수색했을 때 조동팔은 끝까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믿던, ‘사람의 아들’의 고독한 신성을 따르다 독을 마시고 자살한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는 방법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읽다 보면 크게 구분되는 두 가지의 이야기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이야기와 민요섭의 노트에서 얻은 아하스 페르쯔의 수행 이야기, 그리고 아하스 페르쯔와 예수가 대립했을 때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답문의 이야기, 민요섭과 조동팔의 이야기와 민요섭이 새로운 신을 찾아 떠났다가 결국 환멸만을 갖고 돌아온 이야기 등 수많은 시퀀스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나의 상황만을 가지고 일반적 순서를 따르는 소설이 아니라 시간 속에 또 하나의 시간이 있고, 앞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공간의 변화 또한 느낄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작품 속에서 민요섭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하스 페르쯔 둘 사이에서 고민한다. 예수는 모든 사람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으나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인 야훼를 믿고 순종할 것임을 강조한 독선적인 교리를 갖고 있기도 했다. 이것이 민요섭에게는 인간을 보듬어주어야 할 당연한 절대자로서의 성격에 위배된다고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청년 시절 아하스 페르쯔가 겪었던 수많은 의문들과도 상통한다. 그 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위선자였으며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만든 파괴자이기도 했다. 당장 성경을 살펴보아도 야훼가 성을 내어 세상을 홍수로 잠기게 하거나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은가. <사람의 아들>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정서(正書)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토마스 복음서에선 어린 예수가 공공연히 저주를 걸어 사람을 죽이거나 살려냈다는 이야기도 담겨 있으니 민요섭은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대상을 찾아 헤매다 아하스 페르쯔라는 과거의 인물을 조사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사랑 그 자체의 신을 갈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 존재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근원적인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사람이 사랑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사랑만을 받고 자란 사람이 과연 자신의 이해가 통하지 않는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에도 타인에게 사랑을 전하고 무조건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민요섭은 예수야말로 기쁘거나 화낼 줄 아는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는 걸 알고 자신이 탐구했던 신보다 예수가 더 사람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제자인 조동팔에게 알리지만 이미 자신들의 신을 맹신해버린 조동팔은 분노하며 칼로 민요섭을 죽인 것이다.
세상엔 수많은 종교들이 우리 사회에 성행한다. 신을 믿는 종교부터 신이 아닌 가르침을 믿는 종교까지, 유일신을 믿는 종교부터 다신을 믿는 종교까지 너무도 많은 종파들이 있으나 그들의 믿음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힘은 사랑과 신념이다. 범인(凡人)에 불과한 인간은 자신을 길러준 절대자에 대해 제의를 올리고 신은 갸륵하게 여겨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지를 답례로 주는 것이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기본 이념이다. 모든 신들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수많은 표정의 얼굴을 하여 선물과 심판을 각기 다르고 공정하게 내린다. 하지만 왜 신이 그래야 하는가. 신이 절대자라면 아예 사랑과 긍정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데에 온 힘을 쏟으라고 말하면서도 그저 정신적인 의지만을 지니게 하는 신이 어찌하여 우리의 인도자인가. 솔직히 나도 어렸을 때 이런 질문들을 했고 지금까지 신을 믿지 않는다. 사람을 믿는다. 민요섭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야훼 같은 신은 그저 관념화된 하나의 숭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이상적인 대답(뜬구름 잡는 대답에 더 가까운)보다는 인간이 처한 현실을 보다 세밀히 살펴보고 천상의 관찰자가 아닌 지상의 동반자로써 삶을 느껴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만을 주는 그들만의 신보다는 예수처럼 사람의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더욱 인간에게 가까운 모습이 아닌가. 예수를 보면 볼수록 그는 인간과 닮아 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보아도 그는 분명 인간과 함께 호흡하고 경험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누구보다도 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이였다. 이 때문에 나는 조동팔이 따랐던 그 ‘고독한 신성’에 연민을 갖는다. 종교 자체가 지식이나 현실은 아니므로 누구든 그러한 의문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신의 말은 공허하다. 그것이 내가 사람을 믿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