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년 이후 시집 10권에 대한 단평 - 한국시문화회관 - 문예도서관 - 문예도서관

Top 영역 건너뛰기
Top 영역 끝
본문 시작

문예도서관

문예도서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식, 정보, 중요한 자료들을 편집자들이 집필해 놓은 공간입니다.

2010년 이후 시집 10권에 대한 단평
김민구

1. 『유령들』 / 정한용  (2011년 민음사)

  이것을 과연 시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은 시적 공간을 배정할 때에 거의 전편의 도입부에서 상처와 비극의 기사를 빌려온다. 사전이나 신문기사 혹은 다른 책에서 한 대목을 가져온 것 같은 지시문을 그대로 차용한 후 그에 대한 시를 쓰는 식이다. 시편 속의 공간은 세계 2차대전부터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내전 사태 등 전쟁과 폭압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내면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 비극의 공간은 거의 전세계적으로 발발하고 있는 전쟁이나 폭압, 폭정에 의하여 구축되어지며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듯 국가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가치의 충돌이나 종교의 분쟁으로 인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헛되이 죽거나 상하는 모습을 가장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한용 시인은 시의 형식에서도 기존의 시와는 무척 다른 방식을 택하는데, <황금 해안>에서는 노래 가사처럼 시를 쓰고, <핑크빌>에서는 신문기사와 인터뷰처럼 글을 썼으며 <미라발 자매의 노래>에서는 등장인물 몇 명에게 배정된 시가(詩歌) 비슷한 뮤지컬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실어증에 대한 사례 보고>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한 후 기록하는 의료카드처럼 모든 문장들이 형식화, 체계화 되어 있다. <지옥문>은 르완다 내전을 겪은 난민에게 요청하는 인터뷰이고, <레퀴엠>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서 사망한 여성이 살아있는 남편에게 건네는 유언장이며, <현장 검증>은 살인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다. 아무런 미화나 묘사 없이 그저 사실(Fact)만을 전달해줄 수 있는 통로는 바로 우리가 전세계의 모든 뉴스나 가쉽거리를 알 수 있는 신문과 TV뉴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이 미화하지 못하는 것은 죽음 뿐이 아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야만과 폭력성 역시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정한용의 시에서 인류는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흉포함을 택한다. 그리하여 가장 많이 상처를 입는 부류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난민들이다. 정한용은 이런 최약자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객관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위와 같은 형식을 택했는데, 이것을 시라고 우긴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시집 『유령들』에 상재된 작품들은 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일방향적이다. 시의 형식을 빌려 간략하게 분량을 줄여놓은 역사서나 기록보관도서라고 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인간은 어째서 언젠가는 삶을 마감할 제한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강자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세월 동안 무수한 약자들을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피해자들이 반드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국가와 가정을 잃은 난민의 신세가 되어 떠돌아야만 하는 이유란 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바로 정한용 시인이 포커스를 두고 있는 물음이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없다. 상처와 폭압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피난처도 없으며 임종할 때 곁에 있어줄 동반자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현실감 있게 그 사태를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정한용 시인이 택한 방법은 무척이나 형식적이고 투박한 류였으며 그 때문에 과연 이 시집을 시문학의 어떤 지평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의문이 생기게 한다. 
2. 『노래』 / 조인선  (2010년 문학동네)

  시집의 앞날개를 펼쳐 저자의 약력을 읽다가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한 문장이 있었다. '현재 안성에서 축산업을 하고 있다'라는 문장이었다. 축산업이라면 대체로 소나 돼지처럼 가축을 사육하는 농업 방식을 말하는 것인데, 정말로 그의 시집 속을 이루고 있는 공간은 일정한 급료를 받지 않고 가축의 상태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 그의 궁핍한 생활상과, 소, 돼지, 닭과 같은 축산업의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베트남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거의 대부분의 문인들이 어느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교직에 있는 것과는 달리, 조인선 시인은 안성에서 가축들을 돌보며 베트남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후 생계를 근근히 이어나가는 것 같다. 그리하여 시집 『노래』는 축산업 농가의 한 시인이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시를 향한 열망과 시를 쓰고 싶다는 열병으로 가득한 습작기를 다루면서, 공간적으로는 서정과 목가를 취하다가도 자신을 기댈 곳은 문학 밖에 없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노동문학의 계열을 따르지 않는다. 대체로 농촌이나 기타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시인들이 가장 많이 택한 형식은 시를 민중과 더욱 가깝게 닿도록 하여 스스로의 권리를 문학적으로 쟁취하자는 내용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인선 시인의 『날개』는 시인 본인의 인생 궤적에 대하여 항상 자기 연민에 가득 차있다. 용산 사태에서 모티프를 얻은 시 <노래3>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 누군가를 욕하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당시 진보 계열의 문인들이 수많은 선정시를 발표하고 정부 및 여당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곤 했던 작품들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용산 사태에서의 슬픔이 결국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절망으로 발전한다. 그의 시에서 시적 화자가 나오는 곳은 문학의 현장도 아니고 사회와 민중의 노동터도 아니다. 오직 늘 계속되는 시인의 일상이다. 한겨울 알을 품고 있는 닭을 보고 자신이 한때 시를 품었다는 것을 말하거나, 송아지의 탯줄과 사과의 꼭지를 보고 아내의 출산을 축하하곤 한다. 그의 시는 대체로 서정적이고 목가적이다. 한 편이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기 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풍경처럼 보이고, 그 세월의 흐름 같은 시골의 풍경 속에서 옆에 남겨지는 스스로와 이미 고인이 된 부모를 그리고 있다. 말 없이 평생을 살다가 가는 가축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자신 곁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베트남인 아내며 유치원에 다니는 딸 등을 바라보며 그들에 대한 슬픔과 기쁨 모두를 취하고 있다. 

  특히 <한 줄의 연시>에서 조인선 시인은 약 70행에 달하는 시를 쓰되 일연일행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서술어미가 평서문의 그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단어, 즉 명사절로 종결된다. '수천 수만의 새가 몰려오는 너의 입술'이나 '화분을 머리에 이고 뛰어가는 달빛' 등 70여 문장들이 기술되어 있다. 그의 시편들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무궁한 연민을 찾아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비화하거나 격정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조인선 시인의 시는 차분하면서도 내면의 의식적인 부분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철학적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시적인 표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어찌 되었든 동물과 목가에서 노동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볼 방법으로 시를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집 한 권으로 그가 걸어온 습작기의 열병으로 가득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페이지 위로 흘러가고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시를 발견하고, 다시 그것에서 시적 언어를 발견하며, 더 나아가 시와 동반된 자기 인생의 궤적을 보다 확실히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작품집이었다. 

3. 『찬란』 / 이병률 (2010년 문학과지성사)

  이병률은 현대 시단에서 시행을 마치 진술하듯이 전재해나가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적절히 묘사가 들어있긴 했지만 대체로 시의 배경으로 구축된 장소가 바로 시인 본인이 여행을 가본 적 있는 공간이거나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겪은 일을 쓴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 이병률 시인은 외국의 어느 거리나 박물관에서 본 것을 가지고 쓰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눈높이를 현재 자기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일상의 좁은 측면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거두어진 시선의 폭이 결코 좁아진 것은 아니고 오히려 자기 내면을 향해서는 더욱 깊어졌다고 보인다. 쓰는 것은 이병률이라는 한 개인의 몸으로써 쓰지만 시 속에서 이루는 것은 시인의 몸이 되어 전체적으로 시인의 운명 같은 것이 드러나고 있다.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은 아주 작은 일, 혹은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다 보니 가끔 자연스럽지 않은 문장들도 몇 차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리는 대체 우리의 몸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아주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관찰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돌이켜보게 하는 문장들이었다. 
  이병률의 시 작품들은 대체로 한 편 자체로서 기능하고 있다. 섬세한 문체를 쓰는 것도, 탁월한 인식력으로 쓰는 것도 아니지만 단지 완성된 시 한 편 자체에서 사유의 힘이 느껴지곤 한다. 그의 작품들은 만약 한 연이나 한 행으로 떨어뜨려 놓으면 결코 시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짤막한 일기이거나 수필의 한 대목이라면 모를까, 이것이 과연 완성된 시 한 편의 부속품이란 말인가, 싶을 정도로, 과하게 말하면 조금 사변적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분량이나 구조가 이전 시집들에 비해서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시의 절정에 다다르면 압축미가 극대화되어 아주 짤막한 시로도 거대한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병률의 『찬란』에 상재된 짧은 시들은 시인이 의도한 대로 강하고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의도나 메시지, 독자와의 소통 능력이 이전 시집들에 비해서 조금 약화된 것 같아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바람의 사생활』에서 보여주었던 어떤 시인 여행자로서의 낭만 같은 요소가 좀 더 발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병률은 여행산문집 『끌림』에서 그것들을 긴 수필로 다룬 후 시적으로 다시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은 시집이었다. 


 4. 『내가 원하는 천사』/ 허연  (2012년 문학과지성사) 

  내가 원하는 천사, 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은 희망보다는 절망이, 천사보다는 악마 같은 종자들이 많아서 이런 제목을 붙인 걸까. 그렇다면 시인이 요구하는 천사의 자질은 어떤 것인가. 천사라고 반드시 선해야만 하는 법은 없다. 천사는 세상을 보다 살 만 하도록 정화해주는 신적인 존재이므로, 어쩌면 세상 자체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비윤리적인 사람들의 운명을 신탁에 맡겨야 할 것이다. 그때 천사는 결코 관대한 자가 아니라 아주 엄혹한 재판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시인이 원하는 천사는 바로 그런 것일까? 
  시인은 세상을 관찰할 때 시들어가는 것, 저물어가는 것, 끝나가는 것 등 사멸해가는 과정에 놓인 것들을 원고지에 옮겨 적고 있다. ‘기억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은 이미 낡은 것이다 (「소립자2」)’와 같은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허연 시인에게는 기억처럼 손으로 잡히지 않는 무연한 것들 역시 분석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는 낡아 없어질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 승려가 된 친구에게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물으니 길에서 죽을 거라는 답변을 듣거나 (「열반의 놀이동산」), 둥지 밖으로 떨어진 새가 겨우 살아나 아이들의 손에서 컸을 땐 너무 비대하여 날지 못하고 죽어버린 걸 보고 애초에 저 새는 죽는 게 섭리였다고 말하거나 (「둥지에서 떨어진 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生이란 바로 무덤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는 등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허연 시인은 애초에 인생이란 허무주의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시인이 본 세상의 섭리는 오로지 죽음과 사멸을 수반하고 있다. 아무도 세상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고 그저 테두리만 겉돌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버려진 시체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허연 시인은 표제작인 「내가 원하는 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라고 말한다.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 그것은 우리가 천사에 대한 선입견과 같은 굳어진 이미지를 깨야만 한다고 소리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허연 시인에게 천사는 바보이고, 접착제로 붙여놓은 날개가 떨어져 비행하지 못하고, 진흙탕에 처박히고, 비행 실수로 고가도로에 불시착하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지상을 내려다본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모습이 자신이 원하는 천사의 이미지라고 주장한다. 천사는 결코 신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의 다른 모습과 동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의 사자(使者)로서 가지고 있는 지엄한 천위(天位)가 아니라, 철저히 자존심이 구겨지고 낭패감을 맛볼 수 있는,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마치 고정희 시인이 ‘하느님 아버지’를 ‘하느님 어머니’라고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듯이, 신적인 존재가 반드시 경전에 글귀로서 새겨져 있는 교리의 법칙에 따라 창조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전체적으로 시집의 분위기는 저물어가고 없어지는 것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숙명처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길이라는 생각과도 상통하고 있다. 뛰어난 인식보다는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집이다. 


5. 『먼 곳』  / 문태준  (2012년 창작과비평사)

  문태준 시인은 현대 시단에서 서정성의 계보를 대단히 충실하게 잇고 있는 젊은 시인이다. 하지만 젊은 작가답지 않게 그의 시는 마치 지용이나 미당의 문학세계처럼 명료하면서도 시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강하여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전 시집들 중 가장 최근에 상재한 『그늘의 발달』 역시 상당한 단시(短詩)들로 이루어져 있다. 분량이 적은 시들은 정지용과 박용래, 김춘수, 전봉건을 떠올리게 하고, 산문시나 어느 정도 행이 많은 작품들은 한용운과 백석과 고은의 시풍을 많이 따르고 있다. 시집의 제목 역시 지극히 서정적이다. 『맨발』, 『가재미』, 『수런거리는 뒤란』등으로 이번 시집 역시 훨씬 자연에 가깝게 닿아 있는 상들을 주로 소재로 빌려오고 있다. 동시 같으면서도 무게가 있는 작품들이다. 문태준의 시들은 자연이나 일상에서 발견한 소재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여 스스로가 마치 자연의 일부인 양 다루고 있다. 자신의 육체에서 자연의 일부분을 발견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연의 풍광과 일상의 사건들에서 자신의 깊은 속에 내재된 추억이나 과거, 아픔, 상처들을 적절히 교합하여 시를 창출해낸다. 
  대체로 이번 시집들에서는 시적 화자로 자신의 유년을 드러낸다. 「은하수와 소년」, 「영원(永遠)」, 「어머니는 찬 염주를 돌리며」, 「장봉순 할머니」, 「비탈과 아이」, 「속사(速寫)」 등이 그렇다. 문태준은 시적 화자를 가리켜 자신의 유년기에 놓인 어린 본인이라고 진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적 계보를 읽을 때, 문태준의 시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강렬하게 드러나며 그로 인해 어떤 소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동화되는 물아일체 사상이나, 화자가 타인이 되고 타인이 자연이 되었다가 종래에는 다시 스스로의 내면으로 돌아오는 환생의 이미지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시집 『먼 곳』은 문태준 시인의 세계에서는 결코 서정성이 추락할 수 없으며 천하가 모두 시인의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명백하게 견지하여 시인으로서 살아갈 것이라는 의지가 모든 시편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6.『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 이수명 (2011년 문학과지성사) 

  이수명 시인은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을 이루는 작품들에서 진술적인 상징성이 강한 문체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상징성이 강하다는 뜻은 시어가 내포하는 의미가 다변적이어서 정확한 하나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유도할 수 있도록 모호성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술적인 이수명의 시는 다소 산문적인 어투로 나타나지만 그로 인해 상징적인 이미지들의 명도가 진하게 배가되고 있다. 게다가 상징적으로 쓰니 꼭 시가 현실에 기초할 필요가 없어지고 다소 환상적인 시적 공간으로 변모하여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리하여 생짜로 서정적인 시들을 보면 한 번에 작품을 관통하는 개별적인 주제를 포착할 수 있지만, 이수명의 시들은 시의 내용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시인의 의도까지 알아내야만 하는 수고를 더한다. 과연 이 상징적 표현들이 시 속에 필요한가? 또 그러한 표현들이 걸리는 부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시집 위로 던지면서 페이지를 넘어간다. 
  사물에 의인화를 입힘으로써 이수명 시인은 반드시 시적 화자에 의해 지칭되거나 지시되어야만 사물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완벽하게 기능할 수 있다는 경계를 모두 허물어버린다. 밤이나 바람과 같이 가시성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시어들 뒤에 ‘은/는/이/가’와 같은 조사들이 붙은 후 동사형 어절이 옴으로써 이수명의 세계에선 등장하는 모든 단어들이 그 쓰임에 구분되지 않고 자유롭게 기능하고 있다. 사물은 사람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사물은 스스로가 본질과 인격을 갖고 있는 일종의 사념체 비슷한 성격을 띤다. 어쩌면 이를 사물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명 시인은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에서 자연이 주는 이미지나 상징성을 충실히 섬기는 자세를 취한다. 풀이 목을 휘감거나 베어내고(「풀」), 잠이 자꾸 자신을 깨우거나(「잠의 선율」), 긴 소매에 자꾸 매달려 살아가며(「어떤 소매」) 시가 전개된다.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닌 표현에서의 실험이다. 모든 시인이 가져야 할 자세는 언어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에 고개를 숙이고 순종함으로써 기존 문학이 가지고 있는 규범을 초월하여 자유자재로 제 의미들을 마음대로 왜곡하거나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에 일조해야한다는 것이 이수명 시인의 지론일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 시집을 대했을 때 현대 시단에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지평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느낌이다. 


7. 『오늘 아침 단어』  / 유희경  (2011년 문학과지성사) 

  유희경은 2008년도에 데뷔한 신인이다. 때문에 이 시집은 그의 첫 번째 작품집이다. 대체로 작품들이 산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자신이 시인으로서 그리고 시대의 젊은이로서 걸어온 궤적들을 시적인 문장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철학적이고 심오한 물음을 던진다거나 어떤 시류를 역전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아무래도 그의 첫 번째 시집이므로) 그가 등단 이전에 어떤 시를 써왔고 그 시가 다시 그의 과거에 어느 순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유희경의 작품들을 독해하다보면 그도 역시 여느 문학청년들처럼 시인으로서의 우울과 절망 등을 지나왔으며 그런 이미지들이 시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시간 위에서 걸어가는 궤적들에 스스로를 포함한 다른 이들까지도 모두 동참시킨다. 시적 낭만과 우울을 향하여 계속 걸음을 옮기다 매번 새로운 인상들을 발견한다. ‘하얗다 아직의 시간 속으로 우리라는 초췌한 이름 눈 덮인 오늘 밤은 거대한 동굴 같기만 하다(「폭설」)’ , ‘저녁이 되면 스스로 사막이 되는 방법을 연구한다 더 빨리 늙기 위해 천천히 걷고 뒤로 걷다(「지워지는 地圖」)’ 등 유희경은 늘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 끝에서 죽음이 시작되는지 아니면 또 다른 과거의 모습이 진행되는 것인지를 탐구한다. 그의 시들은 대부분 산문적이지만 다른 시인들처럼 그저 일기장을 몇 문단으로 줄여놓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짧지만 그것 자체로도 시적 수기(手記)가 완성된다. 유희경은 시인이 되기 위해 지나온 모든 광경들을 다시 되짚어가며 그것을 시 쓰고 있는 현재로 불러온 후 수많은 시간의 궤적들 사이에서 몸부림치듯 시를 펼친다. 그리하여 시집 속의 작품들은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첫 시집부터 본인과 타자를 모두 동반자로 생각하고 시적 세계로 데려간다.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8.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고은  (창작과비평사 2011년) 

  고은은 물론 우리 현대 시단의 원로 시인임에 분명하다. 초기시들은 무척 아름답고 슬픈 이미지로 가득했지만 최근작들은 『만인보』를 비롯하여 (물론 『만인보』가 완성된 것은 문학사적으로도 대단한 의의가 있겠으나) 대부분의 작품들이 큰 의미 없이 씌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시집을 읽기에 앞서, 나는 사실 고은을 크게 좋아하지도 않으며 그로 인해 감명 받은 작품들은 아주 많지는 않다. 스승이었던 미당 서정주가 2000년 12월에 타계했을 때, 미당이 임종 직전 가장 보고 싶었던 자랑스러운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작고하자마자 미당의 친일(親日) 행적을 비판하는 이른바 「미당 담론-자화상과 함께」를 【창작과비평】2001년호에 발표한다. 결국 미당을 따르던 다른 제자 문인들, 그 중에서도 문정희, 이근배 시인과 이남호 문학평론가가 고은 시인의 담론에 대하여 반론을 발표하는 등의 맹공격이 시작됐고, 그로 인해 미당의 작품성과 친일적 행보 사이에 경중을 논하는 미당을 문학적으로 평가하거나 역사적으로 재단하려는 의식이 등장했다. 고은은 미당의 친일 행적을 단죄해야 한다는 글에서 스승에 대한 보은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회 추천이 완료되어야만 비로소 등단이 확정되던 유수의 문예지 【현대문학】에 젊은 고은의 작품들을 단 1회로 3편을 실어 문단에 오르게 한 사람이 바로 스승 미당 서정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정희 시인의 반론을 빌리자면 ‘스승의 무덤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침을 뱉었다. 그 때문에 나는 고은 시인 자체를 크게 좋아하지 않았으나, 매번 도서관 서가에 『만인보』와 같은 두꺼운 책들만 꽂혀있다가 새로운 시집 한 권이 나온 것을 보고 한 번 보게 되었다. 그 시집이 바로 『내 변방은 어디 갔나』다. 
  전체적으로 대단히 존재론적인 사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자연 현상과 사회의 일상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불교적으로 성찰하게끔 안배해주는 모습임을 역설한다. 일례로 ‘바람 부시는 날이사 내 몸뚱어리 내 못난 손발도 / 씌어대는지 / 씌어대는지 / 금방 소나무 가지들로 되고 말아 / 그예 바람에 홀린다(「뒷산」)’ 과 같은 대목이 그렇다. 자신의 비루한 손발이 바람을 만나자 금세 소나무의 가지들로 육화된다. 또한 그의 시에선 생명을 수반하는 단어로써 독점, 집착, 죽음의 인질, 비겁한 정치, 이데올로기, 폐기된 물레, 물레방아, 폐기처분된 이웃 등이 사용된다. 그러나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막을 수 없으며 이를 시적으로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다. 고은의 원숙한 내공이 느껴지는 시집이지만 『미당 담론』으로 인해 고은 자신도 사후에 문학과 인간성에 대한 판단이 엇갈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9.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2011년 문학과지성사) 

  박형준 시인의 새 시집은 나로서는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다. 첫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이후 그의 시집들에 상재된 작품들은 분량이 조금 짧든가 하는 식의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분량이 적은 시들에서도 물론 이미지들은 강대하게 치솟아올랐으나 박형준 역시 서정시인이기에 아무래도 자연 풍경에 대한 시편들에는 이야기가 없어 아쉬운 공백들이 몇 점 있었던 탓이다. 그에 비해 이번 시집인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비교적 긴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박형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적 묘사와 진술, 인식과 상상력 모두를 획득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무덤 사이에서」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궤적을 탐구하면서 스스로의 유년을 세상이 창조되고 생명체가 탄생한 지점에 배치함으로써 지구의 시간의 역사를 관찰하고 그 당시의 순수함을 시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꼬리조팝나무」에서는 아버지가 작고한 후 부친을 그리워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부자(父子)가 서로 통일화되며 진행되고 그러한 전개 속에서 아버지가 사랑했던 한 여인의 모습을 지극히 서정적인 감성으로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절정으로 선별했던 작품은 「부뚜막」이었다. 이 시집에는 아버지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아마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출간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뚜막」에서 아버지는 부뚜막이 있는 오래된 집에 살며 자식을 뒷바라지하는데, 그 모습이 이제 눈부신 황혼으로 저물어가는 일몰의 정경으로 병치되어 ‘당신은 이제 지평선에서 / 얼굴을 묻고 / 불씨를 불고 계십니까’라는 행으로 귀결된다. 그 속에서도 자식 걱정이 있는지 묻는 시인의 문장에서 애틋한 슬픔이 느껴진다. 시집의 제목처럼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10. 『방독면』  / 조인호  (2011년 문학동네시인선) 

  현대시단이 형식의 실험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조인호의 시집에서 서정성이란 없다. 과격한 상상과 실험적인 형식의 표현들이 그 기저에 깔려 세상을 불온하게 만들고 제대로 숨쉴 수 없는 오염된 공간으로 만든다.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잊고 살아가는 현실의 한 단면임을 비판하듯이, 그러나 이 시집 속의 작품들은 모두 진술적인 산문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이것이 시인지 아니면 다른 에세이 비슷한 글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여 모두 시라고 부를 수 없듯이, 조인호 시인은 세상을 관찰하며 제대로 숨쉴 수 있는 도구 없이 맨 정신으로 살아가는 일은 몹시 고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불신과 환멸이라는 유독가스로 가득 차있고 그 속에서 문학을 하는 순수한 영혼의 시인들은 마치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에 대항하는 병사들처럼 ‘시인 훈련병’이 되어 문학을 습관화한다. 그러므로 조인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문장의 어투들은 마치 정언명령처럼 세상에서 호흡하며 살아남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면서 전개된다. 
  방독면은 화생방전, 즉 화학전/생물학전/방사능전을 수행할 때 호흡기관을 보호하고 순수한 공기를 체내에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병사들 개개인의 보호 장구다. 한 번 쓰면 일단 숨이 턱 막히며 입으로만 숨을 쉴 수 있다. 얼굴에 쓰는 것이므로 시야에 김이 서려 보이지 않는데다가 호흡이 불안정하여 평상시처럼 걸음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왜 조인호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방독면』이라고 지었을까? 세상은 그만큼 살아가기가 황폐하고 숨 막히는 일상의 반복이란 말인가. 방독면을 착용하지 않으면 질식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 그러나 너무 산문적으로 진술되어 이것이 현실을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문학 속 작품세계에 설정된 공간을 이야기하는지 확실하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형식을 계속 바꾸어가며 역설하는 까닭에 이것이 시인지 아니면 뮤지컬의 한 대본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렵다. 【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시집도 지면을 타 시집과 차이를 두고 있다. 작품이 세로쓰기가 되어 있거나 가로로 길게 누워 있다. 시집이라는 하나의 물리적 텍스트조차 기성 문단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그리고 말의 허비가 너무 많아 시적 아름다움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시 속에서 어떤 도약을 할 때 어느 정도의 진정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조인호의 시집에서는 그런 점이 몹시 불명확한 간극으로 펼쳐져 있다. 시 속에 담긴 세상의 단면을 보기도 전에 텍스트에 막혀 넘어가지 못하고 숨이 막힐 정도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려는 의식만 기저에 깔려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치유해야한다거나 바꾸어야 한다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다. 문학이 세상의 구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말은 누구나 아는 것이고, 그런 걸 애꿎게 시에서 말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무어라고 말은 많이 하는데 그만큼 언어가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니 시집 전체가 무척 답답한 텍스트가 되어 버린 것이 아쉬운 작품집이었다. 

 

목록

문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