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검다>의 감상 - 김민구
영화 <집은 검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한센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한센병은 나병(癩病), 속칭 문둥병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병명인데, 나병을 일으키는 병균과 장기간의 긴밀한 접촉을 통한 전염으로 확산되는 무서운 병이란다. 감각이 마비되거나 없어지고 피부가 썩어버리는 이 끔찍한 병은 ‘전염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양성 반응이 나타난 환자는 정상인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격리시켜 살아가게끔 조치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피부가 부패되거나 갈퀴처럼 변형될 수 있어서, 증세가 심한 환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정상의 신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천형(天刑), 즉 하늘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정신은 놀라울 만치 순수하다. 온몸이 일그러지고 썩어 들어가는 이 천형-그때는 그렇게 불렀으므로-을 내린 신을 저주하기는커녕 오히려 찬미하고 있다.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신체의 부위를 준 것 자체가 그들은 고마운 것이다. 귀가 있으면 아름다운 선율을 듣게 해준 신의 은총에 대해서, 다리가 있으면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해준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대사로 영화를 시작한다. 나는 이들을 보며 문득 농업학자이자 시인이었던 한하운(시인,1919~1975)을 떠올렸다. 한하운 시인은 불과 17세가 되던 해에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고, 900군데에 달하는 궤양이 온몸에 번져있었다고 한다. 물론 <집은 검다>의 나병 환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슬프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조금 다르지만, 나는 ‘나병’이나 ‘문둥이’하면 여지없이 한하운 시인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 조문하러 오는 친척들과 이웃들이 나환자인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길 거라는 것을 알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내가 없어져야 한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 속의 천형을 탓하며 슬픈 시를 쓰다가 갔다. 어쩌면 <집은 검다>의 사람들도 속으로는 한하운과 같은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신체의 오감(五感)을 아주 당연히 갖추어져 있다고 항상 생각한다. 앞에 놓인 물병이 만져지는 것과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은 사람이면 당연히 그런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세상 어떤 난관도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심사를 알지 못하듯, 나 또한 나병 환자들의 생각을 완벽히 읽지 못한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신체에 대한 고마움을 항상 상기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시문화회관에서 문학을 공부할 때 1시간 동안 장님이 되어보는 일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사람의 전신이 100냥이면 눈은 90냥이라고 하던데, 뚜렷이 보이는 시야가 없어지고 그저 청각에만 의존해야하는 그 상황이, 나에게는 1시간이겠지만 나병 환자나 다른 시각 장애인들에겐 평생이 아닐 것인가. 영화 속 대사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금요일, 토요일, 다시 일요일······.’처럼.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집은 검다’라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스님 한 분이 내게 내려준 화두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나병 환자들만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일주일이 아니라 평생 동안 생각해야 할 말인지도 모른다.
‘집은 검다’를 듣고 난 시각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환자가 마침내 집(격리소)에 들어섰을 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곳에서 사는 한 여자는 눈에 화장을 하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과 같은 사람들만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눈이 완전히 멀어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된다면, 자신과 같은 모습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정작 거울에 비친 자신조차도 볼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집은 검다’라는 문장은 나병 환자들에게 불행히도 치유의 가능성은 얼마 없으며, 오직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