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만드는집, 2017, 정가 10,000원)
으랏차! 계룡인가, 무등인가, 백두대간 한허리에 불끈 솟아오른 산 하나를 냅다 메다꽂듯 이은봉 시인이 시조집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을 갈팡질팡하는 오늘 이 땅의 모국어 한 마당에 부려놓는다. 그랬구나. 늘 날 선 감성의 칼끝으로 이 시대의 속말들, 슬픔, 아픔, 또는 사랑, 부끄럼 따위를 잘도 도려내 감칠맛 나는 입담으로 시를 척척 써내는가 했더니 바로 이거였구나. 저 신라 향가, 고려가요에서 조선 백성들의 서럽고 기꺼운 가락이 녹아 흐르는 시조의 “밀고, 당기고, 끊고, 맺고, 꺾고, 젖히는” 나랏말씀을 엮어내는 솜씨를 오래 익혀왔던 것이구나. 글감 뽑아내기에서도 종횡무진이다. 앞의 시인들이 미처 못다 쓴 것, 지었다 해도 초ㆍ중ㆍ종으로 넘어가고 휘어지고 돌려 차는 말 놀림에서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간 것들을 이은봉은 티 없는 청자, 백자로 잘도 구워낸다. 책 이름으로 내세운 작품만 해도 “꿈이야 뭇 생명들의 본마음 아니던가. // 버려진 꿈 긁어모아 / 이곳에 쌓고 보니 // 무등산 골짜기마다 / 동백으로 피는 봄볕”에 부닥치니 그만 헉! 숨이 막힌다.
-이근배 시인ㆍ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학로 시낭독회 상임 시인이자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이은봉 선생님이 시조시집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을 출간하셨습니다. 이 시조시집에 대한 설명은 저번주 토요일, 대학로 시낭독회에서 자세히 해주셨는데요. 언뜻 '시조'라는 말을 들으면 무척이나 오래된 시 장르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현대 자유시가 작품의 내용을 통해 작가의 사유가 이루어진다면, 시조는 형식과 율격을 지킴으로써 더욱 견고하고 압축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시조는 사대부, 즉 나라를 통치하는 신분들만 향유할 수 있는 예술 장르였다가 후에 사설시조가 생겨나면서 기존의 시조 형식으로부터 일정 부분 탈피하여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려내어 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현대 자유시를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행간'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곤 합니다. 행과 행 사이의 간격은 그저 하얀 틈에 불과하지만 시인의 사유가 한층 솟아올랐다가 다시 사그라드는 마음속의 굴곡을, 시 읽는 우리들은 느낄 수 있지요. 그 '행간'이란 율격에 개의치 않는 모든 자유시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과도 같은데, 글자 수를 가급적 지켜야 하는 정형화된 시조에서는 어쩌면 작품 한 편이 자신의 육체로 여미고 있는 사유가 훨씬 더 강력한 매력을 품고 있지 않을까요? 내용이 형식을 앞지르지 않고, 형식이 있기에 내용의 심도가 더 깊어지는 그런 압축의 현시(現示). 일부러 표현과 묘사를 절제함으로써 더욱 유구한 세월의 흔적들을 드러내보이는 이은봉 시인의 시조집이 출간되었습니다.
특히 리듬 또는 음보란 단순히 음절의 개수로써만 세어지는 것이 아닌, 낭송될 때 겹쳐지거나 다시 뒤로 밀려나는 그런 발음들을 계산해서 이루어지는 만큼, 구절들을 오래도록 음미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소해 보이는 이미지들 속에 자연의 숭고한 움직임이 깃들어 있고, 도시처럼 인공적으로 구획된 세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계, 꾸밈없이 놀고 흐르고 떠오르고 저어가는 자연에 비하면 우리는 여전히 유년기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서평_김민구(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한국시문화회관 졸업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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