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시계로 알려진 정동진에서 아래쪽으로 고갯길을 넘어가면 그 길이 헌화로였다. 꽃을 바친다는 그 뜻이 신라시대부터 그 바닷가 길에 있어왔다는 것부터가 내게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것이 향가 <헌화가>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사실!
서정주 시인도 이 이야기를 가장 아름답다고 꼽고 있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옛 향가의 세계로 빠져드는 감동을 맛본다. 바닷가 길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남편을 따라 강릉 땅으로 오던 수로부인이 용에게 잡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 몸에서 향내가 났다 하니 그 향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때 나타나 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겠다는 노인의 정체는?
몇 해 전에 와 보고는 이런 곳에 와서 글을 쓰며 마지막 한 철을 지날 수 있다면! 하고, 옛 향가와 같은 시를 쓰는 나의 시간이 내게도 있을 수 있다면! 하고 원했었고, 오늘,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내 시에 담겨 별빛의 향내처럼 맡아지기를 빌어본다.
- 시인의 비망록에서
우리 문단의 대표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 선생께서 시집 『강릉 별빛』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총 5부로 나뉘어 있으며, 1부~4부는 지금까지 발표된 시들 중 시인이 직접 가려 뽑은 대표작이 수록되었고, 마지막 5부는 최근에 집필한 신작시 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3부는 '육필시선'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5부에 실려 있는 신작시들 중 많은 수는 매달 두 번째 주 토요일 오후 5시에, 윤후명 시인을 비롯하여 민용태, 이은봉, 김경민, 강서일, 마경덕 시인 등을 주축으로 한 '대학로 시낭독회'에서 먼저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던 작품들이며, 맨 마지막에 시인 자신을 되돌아보는 비망록이 실려 있다.
시집 『강릉 별빛』은 다른 시집과 달리 두 개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상술한 대로 시인의 자선작과 신작이 실려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집 표지에 명시되어 있다시피 '이미지 시집'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특이성은 시집에 실린 수록 작품 중 신작시가 제일 마지막 부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다. 선생을 애정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전에 공개하지 않았던 신작시를 첫 부분이 아니라 끝 부분에 담고 있다는 것에서 앞으로의 글쓰기 지속에의 희구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신작을 먼저 소개하고 자선작을 그 다음에 실었다면 이 시집은 그저 일반적인 시집의 수록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겠으나, 이 순서가 역전되어 수록됨으로써 계속해서 시를 써나가는 과정 중에 시인이 거처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내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시인은 표제작인 「강릉 별빛」에서, "강릉 바닷가에서 별을 바라보는 것은/이 삶을 물어보는 것/이 삶이 지나면/다시 올 거냐고/어느 바다를 지나 다시 올 거냐고/물어보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별을 바라보는 일과 삶을 살아내는 일을 가로지르는 것은 유장한 바다의 흐름 같은 것이고 더 나아가 시를 쓰는 일이다. 바다를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별은 물고기가 되어/멀리 헤어가기만"하며, "지금 살아있음을 되새기"면서 시인은 살아있음과 시 쓰기가 한 몸에 있음을 갈파하고 있다.
두 번째 특이성은 육필시가 수록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화가로서 전시회도 몇 번 한 일이 있는 시인의 그림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글쓰기 행위가 이미지로 전환되고 그 이미지가 다시 글쓰기의 행위를 불러오는 원환성은 육필시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할 것이다. 표지에 상기되어 있듯 '이미지 시집'이라는 것, 이는 육필시의 이미지, 인쇄된 시에 이미지가 병합되어 있는 시화의 이미지, 그리고 그림 자체만 실려있는 도판으로서의 이미지가 서로 맞물리면서 아름다운 미학을 탄생시키고 있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프랑스의 석학인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Author's death)을 이야기하면서, 더 이상 작품을 읽는 행위에서 저자 자신의 이력은 소용 없는 일이 되었음을 주장한 바 있다. 우리가 읽는 것은 저자 자신이 아니라 그가 지면에 남긴 흔적들이며, 그 흔적들은 저자가 시를 쓰며 꿈꾸던 어떤 너머의 것을 독자들에게 내보여준다. 하지만 시집 『강릉 별빛』은 활자화된 시편 뿐 아니라 이미지를 동원하여, 이미지와 글자가 서로 맞물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시의 행간에서 저자의 총체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림images과 글자letters가 다각도로 교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시화詩畵 이상의 것을 만난다. 시화는 시가 그림보다 더 위계상으로 높이 있는 것이지만 시와 그림이 서로 별개로 존재하거나 또는 합쳐서 존재할 떄, 글자만 있고 그림이 없거나 그 반대일 때, 우리는 시인이자 화가이기도 한 윤후명 선생의 집념 같은 것을 본다. 이 집념은 시집의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눈 덮인 준령 너머로 힘차게 활공해가는 하얀 알바트로스 같은 새에 응축되어 있다. 너무 날개가 커서 움직이기 어렵지만 한 번 공중에 뜨면 대양을 가로지른다는 알바트로스가 제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별빛이 곧 창공의 지도였던 시대가 복되다'한 루카치가 그리워했던 어떤 이상향일 것이다. 큰 눈망울로 세계를 굽어보면서 그러나 계속 비행을 멈추지 않는 새, 나는 『강릉 별빛』을 읽을 때면 꼭 이 새를 가만히 응시해본다.
김민구(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저자 약력 (인터넷 교보문고)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었다. 1969년 연세대학교를 졸업, 강은교, 김형영, 박건한 등과 함께 시 동인지 『70년대』를 창간하고, 도서출판 삼중당에 취직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근무하다가 1977년 첫 시집 『명궁』을 출간하였다.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어 소설가와 시인의 길을 병행하면서 단편 『높새의 집』 『갈매기』 『누란시집』을 발표하였다. 1980년 전업작가로 나서 김원우, 김상렬, 이문열, 이외수 등과 함께 소설 동인지 『작가』를 창간하고, 단편 『바오밥나무』 『모기』 등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시집 『名弓』(1977),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1992) 등이 있고, 소설집 『敦煌의 사랑』(1983), 『부활하는 새』(1986), 『원숭이는 없다』(1989), 『오늘은 내일의 젊은 날』(1996), 『귤』(1996), 『여우 사냥』(1997), 『가장 멀리 있는 나』(2001), 『둔황의 사랑』(2005, 2005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 선정 도서) 등과 장편소설 『별까지 우리가』(1990), 『약속 없는 세대』(1990), 『협궤 열차』(1992) 『삼국유사 읽는 호텔』(2005)등이 있으며, 그외 산문집 『이 몹쓸 그립은 것아』(1990), 『꽃』(2003), 장편동화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1994)가 있다. 이 중 단편 「둔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사막의 여자」 등이 각각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된 바 있다. 한국문학원 원장을 지냈고 국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좌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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