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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냄비 - 한국시문화회관 - 문화칼럼 - 김경민 시인의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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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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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슈가 되는 문화 예술계의 제 문제에 대한 편집자들이 의견을 피력하는 공간입니다. 또는 저자의 허락을 받아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을 소개합니다.
제목

망각의 냄비

분류

 망각의 냄비

 

                     김경민


 

지금 저 개스랜지 위의 냄비가 끓고 있다. 사실 끓는 것은 냄비가 아니라 냄비 속의 내용물이 끓고 있지만 내가 가진 냄비는 특수냄비이기 때문에 내용물이 없어도 잘 끓는다. 저 냄비는 공업용 우지로 만들었다는 라면을 끓일 때도 잘 끓고 평화의 댐 건설기금 모집 때도 잘 끓고 5.16을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단언했을 때도 그 정확한 판단에 잘 끓고 감동했으며 한 정치가가 정계를 은퇴한다고 했을 때도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해서 끓었으며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열차가 전복되고 도시 가스가 도시에서 폭발했을 때도 잘 끓고 슬퍼했다. 그런데 공업용 우지로 라면을 만들었다는 회사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황당하다. 그때 그 냄비는 이미 식은지 오래. 열심히 연료를 제공하며 냄비를 뜨겁게 달구었던 시민 단체는 어디있는가? 북쪽에서 금강산 땜 공사를 하면 서울은 물바다가 된다던 냄비도 이제 식은지 오래. 그 주체들은 그나마 감옥에 있다. 5.16의 주동자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오고 은퇴해서 민족의 스승이 될만한 지도자는 약속을 어기고 다시 선거에 나오고 아들의 병역 문제로 비판을 받은 사람도 선거에 나올 것이고 절대 대통령 생각이 없다던 분도 선거에 나올 것이다. 비행기는 계속 떨어지고 아파트 축대는 무너지고 한국전쟁은 잊혀지고 종주국(?)일본은 돌아온다. 얼마 전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 누드모델이 왔을 때 나의 특수냄비는 다시 끓었고 요새는 박찬호 때문에 나의 냄비는 끓는다. 그리고 다시 정치라는 물리지 않는 요리의 계절, 슬슬 나의 냄비는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과거는 없고, 그 과거에 얹힌 요리의 기억은 없고 늘 현재 속에서 끓기만 하는 나의 특수냄비.


작가나 예술가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 잊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비통한 상처의 기억이든 가장 아름다운 광휘의 추억이든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한 번 달아오르면 오랫동안 뜨겁고 오랫동안 그 요리의 기억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 영화 제작자 이태원씨가 구속 되었을 때 그이의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아주 유명한 영화인들이 검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이미 글로 쓴 적이 있다. 최근에 한 만화가가 외설 혐의로 입건되자 동료 만화가들이 절필 선언을 해가며 항의와 동조 농성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역시 그들의 우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만화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과는 별개로 만화가들의 자기 작업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동료애를 충분히 느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장정일씨가 외설 혐의로 구속 되었다. 그 때〈플레이 보이〉라는 외국의 성인잡지 누드모델이라는 한 여자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와 시기적으로 겹친 때였다. 그 누드모델이 여기저기 방송과 광고에 얼굴을 내밀고 수십억의 돈을 벌어갔다는 때였다. 주로 미국을 비롯한 서양 사람들에게 자신의 온 몸을 상품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성인 상업잡지의 누드모델이 당당하게 들어와 많은 돈을 벌어갔다는 소문이 돌던 때 한국의 한 젊은 외설작가(?)는 구속이 된 것이다. 외설스러움으로 보자면 헨리밀러의『섹서스』나『북회귀선』,아뽈리네르의『돈 주앙』,사드의 작품들이 결코 장정일이나 마광수씨의 작품에 못지 않은데도 말이다. 한국에 태어난 운명을 탓할까? 그런데 매우 놀라운 것은 우리 문단은 이런 문제에 전혀 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졸작이든 걸작이든, 외설스러운 것이든 성스러운 것이든 장중한 주제이든 경박한 소재이든 작가가 자신이 생각한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내 생각에 비한다면 너무나 뜻밖의 태도이다. 우리 문단은 크리스탈과 같이 맑고 투명하고 아름답지만 너무도 냉정한 그릇인가?


얇은 냄비이든 차갑고 투명한 유리 그릇이든 어쩐지 나는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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