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의 빛깔 -김경민
우리는 하회마을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는 폭이 좁은 강이 있었고 그 강 한 가운데 갈대밭엔 몸이 가늘고 긴 마른 풀들이 바람에 몸을 뒤채고 있었다. 강 건너엔 마을이 있었고 교회의 종탑과 지붕들마다 앉아있는 햇살이 있었고 고요가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그 고요는 더욱 분명해졌다. 마른 잔디 위에 마을 입구에서 받은 안내 전단지를 깔고 앉아 젊은 시인 두 사람과 무연하게 펼쳐진 생의 어느 한 때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좁은 내 안의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기와 지붕과 새로 단장한 고택의 담과 담 사이, 맑은 햇살의 싸리비 자국이 선명한 좁은 골목들을 빠져나온 우리 세 사람은 강가에 앉아 마른 풀들이 서로 몸을 부비는 적요한 풍경에 귀를 열고 있었다.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알 수도 없는 그래서 아득한, 온통 환희에 넘실대는 그런 빛나는 형상들의 오색찬연함이 아닌, 막연하고 쓸쓸한, 그렇다고 딱히 슬픔이라고 형용될 분명한 감정도 아닌, 서늘한 느낌의 깊이와 넓이 모를, 그 부피를 가늠할 수 없는 어느 감정의 그 막막함이 있다면, 그래서 잠시 분노와 억울함과 슬픔과 허튼 욕망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생의 어느 한 때가 있다면 바로 그 것이 천국의 순간일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위에 잠시 앉았다.
어제 오후에 이 도시에 도착했다. 어느 동네에서 헛제사밥을 먹고 방학을 맞아 종택을 지키러 먼저 이 도시에 내려와 있던 젊은 시인을 만났다. 강을 따라 우리 셋은 오래 걸었다. 물살의 주름과 만난 햇살들이 무수한 비늘들을 만들었다. 울컥한 마음과 망연한 감정들이 부서지며 함께 흘렀다. 커다란 소의 형상을 만들어 세워놓은 장터에서 저녁을 먹고 수백년을 버텨온 고택에 도착했을 땐 한밤중이었다. 나무 대문으로 들어가 잔디가 깔린 마당에 서니 오른편에 아주 낡고 커다란 사당이 있었다. 젊은 시인은 그 사당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방을 내게 주었다. 방바닥은 아주 따뜻했지만 허공은 서늘했다. 밤새 마당쪽에서 이상한 새울음 소리가 들려왔고 가끔 누군가 밖에서 손잡이를 흔들곤 했다. 수백년 왕조를 지킨 명가(名家)의 조상들이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밤새 창호문을 흔들어대는 바람소리와 흐느끼는 듯한 새울음 소리에 내가 두고 온 서울에서의 온갖 잡념들이 휘휘 몰려들었다. 가끔씩 중간 대문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마루로 나가서 댓돌 위의 신발을 신고 중간 문을 지나 부엌을 지나 다시 문 하나를 지나 화장실로 가고 역순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관문을 지날 때마다 생경한 장면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나도 낯선 공간 어디쯤을 지나고 있다. 분노도 슬픔도 욕망도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종택을 나서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시비(詩碑)의 시를 읽었다. 작자는 종택의 주인인 젊은 시인의 먼 조상님이었다. 교과서에도 실려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이었지만 새삼 우국충정과 스스로의 신세에 대한 한탄, 가까스로 추스르는 한과 분노등이 느껴졌다. 지붕이 씌워진 길가 정류장에서 멀리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길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먼저 모퉁이를 돌아오는 것은 초봄의 맑은 햇살이었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정류장 옆 공터의 마른 풀들이 바람에 우우 몰려다니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투명한 바람과 무연한 햇살이 나를 품고 있는 어느 생의 한 순간 나는 막막하고 벅찬 마음에 온전히 깃들었다.
월간에세이 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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