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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에 대하여 - 한국시문화회관 - 문화칼럼 - 김민구의 문학 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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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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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슈가 되는 문화 예술계의 제 문제에 대한 편집자들이 의견을 피력하는 공간입니다. 또는 저자의 허락을 받아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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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자 시인, 『투명에 대하여 外』, 황금알, 2017. 

 

   우리 현대시단의 대표적인 문인이시며 현대시인협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허영자 시인(성신여대 명예교수)의 새 시집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투명에 대하여.' 초반부에 수록된 31편의 연작시 표제이기도 한 「투명에 대하여」는 글자 그대로 '투명'이라는 상념에 대한 단상을 명료한 시로 엮고 있다. 투명이라는 상태는 우리가 흔히 물이나 공기에 비견하곤 하는데, 그러나 가시적이지 않다고 해서 모두가 투명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깊은 존재론적 사유가 요구된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대상의 위치를 특정하여 지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까지는 완전한 투명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지각할 때, 설령 그것이 무색무취의 어느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여기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명에 대하여'라고 말하면서 시인 스스로가 천착하고자 하는 바는, 투명이라는 완료의 상태가 아닌 투명화의 과정, 온갖 색과 조형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 언젠가 도래하게 될 소멸, 지워짐, 사라짐으로 너울져가는 그 흐름을 보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시성을 삶으로, 투명성을 죽음으로 대응시켰을 때 우리는 서서히 우리 존재의 색과 질감을 잃고 희미해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살아있고 싱싱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의 색과 형태가 점점 활성화되는 자신의 공백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자신의 외연을 더욱 도드라지도록 내보여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비친 나는 훌륭하고 고귀해보여야만 한다는 욕망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또는 살고자 하는 동안 불투명하다. 또한 불투명에서 투명으로 이행되는 과정, 시선과 관심의 집중에서 분산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하지만 시인은 "불투명인 나/언제나 투명이고 싶은데"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투명"이고 싶다고 말한다. 공백, 사라짐, 지워짐의 필연성에 반갑게 악수를 건네는 것이다. 스스로 투명해지고 싶은 존재의 시선은 "무대를 내려오면/슬픈 피에로"에 가 머문다. 무대의 휘황찬란한 조명과 관객들의 박수 및 호응으로  피에로는 그러나 극의 상연이 마무리되자 더 이상 형태를 갖지 못하고 소외되고 만다. 시인은 거기에서 '쓰라림'을 본다. 이 쓰라림은 존재의 사라짐을 어떻게든 거부하고 연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갖는 시인의 연민이다. (「투명에 대하여 18」) 

 

  이 세계를 이끌어온 것은 양자택일을 주문하는 이분법의 논리이다. 선과 악, 좋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과 같은 단순 명료한 이분법부터,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구분하고 위계를 구축해내는 이분법은 눈에 보이는 제국과 식민지의 대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배타성을 지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백인과 백인이 아닌 사람들로 나뉘어지던 시대가 있었고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회의실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나뉘어지는 시대가 계속 진행 중이다. 아프리카 소녀의 눈물과 황인종인 나의 눈물은 모두 투명하고 그 투명과 투명이 서로 껴안아 더욱 투명화되는 것을 느끼는 시인은, '투명'은 죽음도 삶도 아닌 우리 모두의 존재성에 깊이 아로새겨진 가장 미니멀한 원형질이라는 것을 간파해내고 있다. 스스로의 투명성을 온전하게 느끼는 순간 온갖 색과 형태들이 구획해놓은 이분법적 질서, 차이의 질서는 용해되고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른바 백지로 돌아간다는 것, 어떤 색이나 글자들이 새겨지기 전, 쓰여지지 않았으므로 지워짐도 없는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네 맨몸/자존의 투명 위에// 겨울은 가만히/희고도 부드러운 손을 얻는다." (「투명에 대하여 15」) 

 

  우리는 모두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산다.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그것이 사망확인서로 나타나는 행정 절차상의 죽음이든, 일직선을 그리는 심전도로 나타나는 의료 절차상의 죽음이든, 아니면 영화 <더블DOUBLE>처럼 매사에 소심한 자신 앞에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그러나 유능하고 활발하며 사교적이고 또한 교활한 도플갱어의 출현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성이 기존의 관계 네트워크로부터 추방되어버리든, 사라짐은 사라지기 이전의 상태가 계속해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언표하려는 행동과 맞선다. 그 싸움의 승패는 정해져 있고 한 번도 뒤바뀐 적이 없으며 필연성이 곧 안타고니스트이자 나를 둘러싼 청중 전체가 되는 외로운 결투이다. 그러나 사라짐과 반갑게 조우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얽어맨 자질구레한 규칙들로부터 해방된다. 자신을 부르는 사람에게 호응해야만 하던 과거의 '이름 가진 자'에서 그 이름을 비로소 벗게 되는 무명의 상태다. "그는 이 세상에 왔다가/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서럽고도 아름다운/ 무명이었습니다." (「무명」)

 

  투명은 시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투명함의 레벨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거미줄에 걸린 물방울 속에 고여 눈을 뜨는 아침을 보는(「투명에 대하여 29」) 시인은 아침이 아니라 사물 속으로 투과되어 보이도록 만드는 물방울의 특성을, 물방울과 아침이 서로의 속에 서로를 좌정시키는 조응을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고 보이도록 만드는 것을 보기 때문에 시인은 투명화의 흐름에 오히려 자발적 참여성을 갖게 되는 것이고 투명 그 자체에 반갑게 손 내밀 수 있게 된다. 불투명이 나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투명화를 거부하고 어떻게든 색과 조형으로 자신을 덮어 만화방창의 신체와 풍경을 욕망하는 것은 당연하고 공동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꾸미기의 지속이 있고 그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내적 결핍이라거나 공백을 씻어내야만 하는 얼룩으로만 보게 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은 신경증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에 오히려 악수를 건네고 투명해지는 백지화의 상상력으로 기쁘게 돌아가는 것으로써만 우리는 이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이 쓰라는 것을 쓰지 않고 나의 것을 쓰고 언어화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투명한 줄 위에서 즐겁게 춤출 수 있다. 

 

 

김민구 (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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