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집 10권과 대표시 그리고 좋은 이유
문예창작학과 김민구
1. 강정 『키스』
대표시 . 「마술사의 아이」 .
마술사의 아이
강정
1
마술사 부부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마술사 부부는 아이의 고추를 잘라
옷장 깊숙이 숨겨두었다
그날 이후 마술사 부부는 비둘기 마술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열 살이 되자
빈손에서 비둘기를 꺼내거나
팔다리를 묶은 채 상자 속에 들어갔다가
상자 밖에서 나타나는 마술 따위를 익혔다
스무 살이 되자 아이는 자신의 마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사지를 각각 떼어내 따로 놀게 하는 건
부모도 하지 못한 대단한 마술이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팔이나 다리들이
객석에 뛰어들어 마음대로 돌아다닐 때면
무대에서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떨어진 팔다리들이 그대로 사람이 되어
객석에 섞여 앉았다
그 순간 세상 전부가 아이의 마술이었다
세상 전부가 그의 마술이 되자 아이는 외로웠다
아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술에 열광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더 이상 마술에 속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마술이 속이는 건 마술뿐이었고
마술사에게 속는 건 마술사뿐이었다
아이는 무대에서 떼어낸 자신의 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자신에게서 없어진 몸들이 그리웠다
빈 손에서 새하얗게 걸어 나오던 비둘기들은
온통 마술로 변한 세상 귀퉁이 낡은 공원에서 흙이나 쪼아 먹으며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마술의 세상에서 마술사 아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2
아이는 마술사의 아이였다
아이가 마술을 포기하자
아이에게서 떠났던 몸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팔 둘 다리 둘 머리 하나 입 하나 코 하나 눈 귀 각각 둘
아이는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전혀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마술사가 사람과 다를 바 없으니
마술은 이제 오래전의 풍문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는 풍문 속에 잠겨버린 자신의 출생 이전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부모는 아이의 고추를 잘라
옷장 깊숙이 숨겨두었다
검은 비둘기들이 흰 옷을 갈아입고
퍼득퍼득 꿈꾸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신이 알던 세상이 옷장에 갇혀
매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채
점점 이 세상과 멀어진다는 걸 알았다
마술이 사라진 세상
마술사들만 세상의 미끄덩한 표면 위에서
허깨비처럼 놀고 있었다
- 현실과 환상 사이를 교통해주는 사람은 마술사이며 시인이다. 마술사는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기쁨과 동경을 부여한다. 현란한 마술을 펼치는 순간 그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리얼리티의 간극을 넘어 비자기, 비정형의 세계로 전이하게 된다. 시적 화자 자신이기도 할 마술사의 아이는 현실을 알지 못하고 환상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마술은 누군가에게서 배우는 것이므로 일반인에서 마술사가 되지만, 이러한 마술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현실을 접하지 않은 순수한 환상으로 탄생한다. 아이에게 와 닿는 모든 것이 마술로써 건조된 세계이며 그곳엔 더욱 진보된 환상만이 존재할 뿐, 마술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그저 환상만을 만들며 현실을 자신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너무 환상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마술사의 운명에서 벗어날 때, 팔과 다리를 따로 놀게 만드는 마술을 다시 제 몸으로 불러들일 때, 마술사 아이는 평범한 일반 아이가 된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을 때 시인에서 그저 독자가 되는 것처럼, 화자가 마술을 포기하고 모든 힘을 스스로 봉쇄시켰을 때 세계는 다시금 현실성을 회복한다.
강정의 시는 현실에서 벗어난 마술사와 같은 화자가 현실을 향해 더욱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에 닿아있는 장면보다는 저편의 세계를 다루며 상상과 환상세계의 확장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마술로 가득한 세상, 모든 사람이 마술의 비밀을 알게 된 세상이란 다시 말하면 더 이상 마술의 힘이 유효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마술이 속이는 건 마술뿐이었고 / 마술사에게 속는 건 마술사뿐이었다”라는 대목이 그렇다. 미국 최고의 극작가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이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도 ‘마술’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는데, 현실이 아닌 환상, 실재가 아닌 비실재, 실존이 아닌 허상을 바라보거나 동경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후에 마술사 아이는 자신의 출생 이전 상태로 회귀한다. 세상에 아직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로 돌아가 다시 아기가 되고 마술이 없는 세상에서 그저 ‘허깨비’처럼 놀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허위인가 아니면 실재인가? 강정 시인은 시집 『키스』에서 스스로를 사람이면서 초월적인 존재로 설정한다. 시인의 시야에서 시로써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로봇도 마술사도 티브이도 시의 훌륭한 소재로써 기능한다. 시집 『키스』는 마치 황홀한 마술을 다루면서 다시 현실로서 회귀한 다음 아예 새롭거나 원시의 세계가 없는지 관찰하는 동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기섭 『분홍색 흐느낌』
대표시 . 「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 .
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
신기섭
그 옛날 할아버지가 목침으로 찍어서 깨진, 할머니의 얼굴이 한밤중에 눈을 뜨면 있다. 아니 그것은 그림. 흘러내리는 그림. 이 밤, 죽은 할아버지가 기저귀를 돌돌 말아 붓처럼 쥐고 그림을 그리네. 춤처럼, 발작처럼, 온 사방 벽마다 흘러내리는 황홀한 그림. 죽죽 흘러내리는 그림. 그림 속에는 새하얀 함박눈이 내리고 따뜻한 쪽방 한 칸, 양배추 인형들에게 눈알을 달아주는 할머니는 천사 같아. 해맑은 눈알을 달고 아침이면 유모차에 실려 팔려나갈 인형들, 깔깔대는 그림. 죽죽 녹아내리는 그림. (사팔뜨기 불량품 인형들, 눈이 까뒤집힌 인형들도 있지) 이 밤 할아버지가 나를 그 양배추 인형으로 잘못 그렸나? 나 이부자리에서 흘러내려 악몽의 끝, 병든 소녀의 집으로 팔려간다. 엄마엄마 소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소녀가 나의 할머니로 늙어버리는 흉측한 그림. 자꾸만 죽죽 흘러내리는 그림.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할머니가 된다. 품에 안겨 젖 빨아먹고 싶던 생의 모든 아름다움, 따뜻함, 예쁨, 그러나 할머니가 된 것들이여. 할머니가 된 것들은 사랑이 크다. 할머니가 된 것들은 젖이 없다. 냄새가 난다. 할머니가 된 것들은 고약하게 죽는다. 할머니가 된 것들의 사랑 앞에 나는 할아버지, 이 모든 것은 내가 그리는 그림, 한정 없이 죽죽 흘러내리는 그림, 그림 속에서 할머니의 팔이 나와 나에게 눈알을 달아준다. 머릿수건을 벗어 쓰윽 얼굴의 피 닦고 환한 얼굴로 할머니는 말한다. 아침마다 세상으로 팔려가는 인형, 이제 그만 눈 떠!
- 신기섭은 등단한 지 몇 달 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여 그의 시집 『분홍색 흐느낌』은 그 한 권만으로 유고시집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가 부재한 상태에서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남편과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 곁에서 자라왔다. 그의 시 「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은 신기섭 시인이 살아온 내력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엄마 노릇을 한 건 늙은 할머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가? 할아버지는 이미 중증 치매에 걸려 인형인지 사람 얼굴인지 모를 얼굴들을 벽에 그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시인에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부재한 상태다. 소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할머니가 된다는 대목에서, 사람의 시간은 시인에게 중요하지 않다. 소녀가 늙어서 중년 여성이 되고 다시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니라, 시인에겐 할머니가 어머니였고 소녀는 그저 상상 속에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된 것들, 즉 늙어가는 것들은 냄새를 풍기며 고약하게 죽어간다. 육체의 부패를 알려준 것은 자기보다 훨씬 많은 시간 속을 살아온 할머니와 할아버지다. 시인은 젊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부식하고 허물어지고 죽어간다는 순리를 너무 일찍 깨달은 탓일까, 어린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던 시간들이 ‘고약하게’ 죽는다는 대목에서 시를 읽는 독자들은 영속하지 않는 할머니의 존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린 남편이 목침을 들어 내던지는 것을 맞고도 끝없이 병간호에 몰두한다. 다른 시의 대목인 “봄이 오면 엄마가 온대요,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달래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2」), “방 안에 갇혀 할아버지는 벽화를 그렸다 / 우리 엄마라, 할아버지가 그린 엄마의 얼굴은” (「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3」)에서 볼 때, 시인의 할아버지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시인이 분명 어머니의 부재를 할머니의 모습에서 대신하고자 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할아버지의 경우엔 확실하지 않다. 너무 나이가 들면 다시 영혼은 순수했던 아이로 회귀하는가? 할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인 할머니를 동일선상에 위치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치매에 걸려 이성적인 판단에 착란이 왔으므로 할아버지에겐 이성(異性)인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기섭에게는 가족이 모두 부재하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혼자나 다름없다. 결국 그가 바라본 스스로의 처지는 할머니가 눈알을 붙여 납품하던 인형이 되거나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저귀로 그려놓은 벽화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고, 어머니는 자신을 낳다가 죽었고, 할아버지는 중증 치매에 걸렸으며 할머니는 이제 노쇠하여 자신이 더 이상 기댈 수 없다(얼마 후 할머니도 세상을 떠난다). 진정한 가족 부재의 자의식으로 이루어진 시들이 그의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을 채우고 있다. 잔잔한 서정성을 다루면서 시인은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가족부재, 돌아가신 할머니, 이른 나이에 죽은 친구, 할머니의 장례,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 자취집에서 느껴지는 감정 등을 다룬다. 비극이 지나간 일상은 그 위에 슬픔이 덧칠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시인이 할머니에게 바치는 기록일 것이다.
3.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대표시 . 「새들의 직업」 .
새들의 직업
김중일
1
우리집 등 굽은 낙타가 울던 날
그날 밤의 사건들은, 일력(日曆)처럼 빠져버린
검은 새의 깃털 한 장 속에 이미 기록된 일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새가 되었다. 새장 속에 갇혀버린 새, 내 마음의 허공에 새의 언어를 새기는 새, 해진 허공은 해진 고독의 외투. 그건 가짜야 제발 좀 벗어. 동생은 바닥을 뒹굴며 내게 외쳤다. 순간 동생의 입은 제 얼굴을 삼키고, 내 그림자를 집어삼키고 태양 속으로 저물어 버렸다. 하늘에는 보풀이 구름처럼 잔뜩 일어나 있었다.
늙은 가고일이 앉아 졸고 있는 옛집 지붕 아래, 동생과 나란히 누워 올려다본 밤하늘은 무언가 섬뜩하고 날카로운 것에 찢긴 듯 보였다. 넝마 하늘은 온통 찢겨 있었던 것이다. 살점처럼 떨어져나와 너풀거리는 새벽의 별빛들.
새들은 우주로 날아가려는 하늘을 악착같이 깁고 꿰매고 있었다. 새를 찾아 우리는 떠났다. 새들이 하늘을 그냥 내버려두게 하기 위해, 어둠이 하얗게 녹아 흐르는 새벽에 우리는 떠났다. 등 굽은 낙타가 등으로 우는 밤에.
2
동생(同生)이 죽었다.
동생은 죽어 지금 내 발목에 그림자 대신 매달려 있다. 동생은 나를 허공에 질질 끌며 땅속을 걷는다. 땅속을 걷다보면 태어날 자들과 죽은 자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내년에 피고 질 꽃들을 미리 꺾을 수 있을까.
동생이 죽었다.
움직이는 하늘의 파오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듯, 동생의 곡두가 슬픔과 권태의 바깥에서 긴 칼날을 막사 안으로 푹푹 찔러넣듯, 까마득한 하늘 저 멀리 뾰족한 철새 떼가 무수히 박혔다 사라졌다.
동생이 죽었다.
동생은 구름이란 보풀만 가득 핀 낡은 허공을 걸치고 있다가, 한 떼의 새들에 의해 허공과 함께 기워져버렸다. 어제로 벗겨져버렸다.
3
그 시각 우리가 버리고 온 낙타는 ‘별의 동공’을 지고 사막보다 먼 신기루를 건너고 있었다. 신기루는 지평선과 맞닿아 있었다. 지평선 아래로 마치 림보를 하듯 조심스럽고도 경쾌하게, 낙타는 눈물로 가득 찬 두 개의 동공을 등에 지고 새처럼 가볍게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처럼 불가피하게 ‘별의 동공’에 걸려 발밑으로 굴러 떨어져버린 지평선, 낙타의 등은 그렁그렁하다. 물이 다 쏟아진 두 개의 양동이처럼 눈물이 다 빠져나간 눈동자처럼, 마치 세상 그 누구의 마음이든 한 순간에 찢어놓을 수 있는 ‘슬픔’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 동생은 그 두 개의 동공 사이에 지어진 작은 둥지 속에 눈곱처럼, 몰래 끼어 있다.
바람에 찢긴 하늘 언저리에는
새들의 둥지가 있다
새들은 일제히 그곳에서 빠져나와
넝마 하늘을 깁고 꿰매고
다시 어떤 바람도 없는 둥지로 잠자러 간다
여기서부터 새들의 둥지까지
별의 동공을 지고 가는 우리집
낙타의 걸음으로 몇 시니크인가
- 김중일의 시는 시인의 삶과 경험 속에서 존재하는 어느 한 기억의 궤적을 타고 헤매고 있다. 그런 기억 속에서 시인은 목적하는 무언가를 정해놓고 따라 가려 한다. 명백한 목표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 속에서 시를 쓰게 하는 힘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므로 주위는 사막처럼 황량한 세계가 된다. 사막 속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래바람처럼 불어오고, 여행 중에 죽은(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동생의 영혼도 사막 어딘가에서 바람처럼 다가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곁에 존재하고 있다. 동생은 내면 여행에 있어 시인에게 동반자가 되어주며 죽은 후로도 그림자에 붙어 시인을 따라다닌다. 사막에는 끝이 없고 지평선에 닿기 위해 시인을 태운 낙타에게 최종 목적지란 과연 어디일까. 시인의 집은 어디이며 시인이 끝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김중일의 시는 소재에 대해 사유하면서 어디론가 그 속으로 진입하여 헤매는 내용의 시편들이 많다.
“우리는 빗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 축축한 털로 무성한 넓은 가슴으로 / 공중이 우리 가족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눈물이라는 터널」), “갈증이 나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 세탁기 밖이었다” (「砂丘의 달이 자라는 겨를」) 등에서 시적 화자는 한 장소에 머무르지 못하는 방랑벽을 온통 껴입고 있다. 시인은 빗속에서 공중을 발견하고, 냉장고 건너편에서 세탁기를 발견한다. 사물이 지닌 속성에서 그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공간을 살펴볼 수 있는 힘이 강하다. 시인의 손에서 재창조된 세계로 독자들이 들어서면, 시인은 자신과 독자 모두에게 시적인 질문을 던진다. 얼마나 여기에 더 머물러야 하는지, 어떤 상황에 대해서 과연 그러한지. 우리집까지는 낙타의 걸음으로 몇 시니크인지, 그곳에서는 다들 안녕한지 등을 묻는다. 독자들은 잠깐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시인이 구축한 세계에서 시인이 독자들에게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인조차 자신의 세계에 명징한 당위성을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불확실성을 갖게 하고 다시 그것에서 김중일 시의 재미가 발현되고 있다. 이 불확실성의 구조 속에서 시인은 마음껏 질문하고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모호성을 취하면서 그만큼 깊은 사유로 시를 매진하고 있다.
시집의 제목은 ‘아무튼 씨 미안해요’다. 아무튼, 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개인 혹은 불특정다수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단어에 ‘미안해요’라는 사과문을 넣었다. 마치 불확실성의 세계로 들어오는 독자들을 향하는 말처럼 들린다. 김중일의 시는 ‘아무튼’ 뻗어나가고 있고, ‘아무튼’ 수많은 궤적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에게는 ‘아무튼’ 비정형의 세계 속에서 그를 부르는 힘이 있고, 그곳을 향해 느린 낙타의 걸음으로 죽은 동생과 함께 모든 시적 가능성들을 함유하며 길을 떠나고 있다.
4. 장석남 『뺨에 서쪽을 빛내다』
대표시 . 「속초에서」
속초에서
장석남
속초 중앙시장 한가운데 빨간 고무 다라이
맑은 핏물 살얼음 속 허연 돼지머리가 가만히 눈감고 하늘을 향했다 아마도 처음이리
설마 목을 도려낸 자의 배려는 아니겠지
죽어 하늘을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애써 생각한다
아직 미간에 방울소리가 묻는 햇무당이 장을 보러 와서 눈여겨본다
설악산에서 왔을까?
부둣가에서 왔을까?
핏물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 제 호와 홉을 내놓고 고기가 되는
고전적 사랑의 기술
나를 끓여 찬밥을 넣어 말아먹으렴!
싸고 뜨거운,
그리고 언제나 비린 사랑이여!
나의 노독(路毒)이여
- 장석남 시인은 현대 한국 문단에서 서정의 계보를 잇는 문인으로 평가받는다. 백석이나 미당의 서정성에 김수영의 직관성을 배합하여 시를 쓰는 느낌을 준다. 특히 ‘고전적 사랑의 기술’에서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 중 한 대목인 ‘눈을 떴다 감는 기술, 불란서 혁명의 기술 /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것은 대체로 김수영 시인의 직관력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서정성일 것이다. 모든 것에 마음을 투사하고 그것으로 인해 시를 맑은 거울처럼 닦아낼 수 있는 기술. 시인은 속초 중앙시장의 가게에 놓인 돼지머리를 보며 그 자체도 하나의 사랑의 방식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커다랗고 육중한 돼지의 눈은 하늘을 보고 있고, 마치 그것은 돼지의 목을 친 자의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하며, 그런 메시지를 읽어낸 무당이 자신의 제의(祭儀)에서 한 번 오달지게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눈빛으로 다시 돼지머리를 바라보고 있다. 돼지는 자신의 육신을 푸줏간에 넘기고 자신의 대가리마저 인간들에게 사랑으로써 공양한다. 돼지머리의 사랑은 곧 시인의 노독(路毒)이 된다. 시인은 어떤 사랑의 길을 걸어왔는지 유추하게끔 만드는 대목이다. 노독 끝에 있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나는 죽음이라는 것.
장석남 시인의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에서는 가끔씩 김수영式의 언어들이 등장한다. ‘고전적 사랑의 기술’ (「속초에서」), 속의 직관적 어조나, “조선 말기와도 같고 / 일제 말기와도 같고 / 유신 말기와도 같고” (「간송미술관 뒤뜰의 화초들」), “소변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 경솔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가난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변기를 닦다」), 속의 반복성 등 김수영의 시적 언어를 계승한 모습이 빈번하게 보인다. 김수영 시인이 서정성보다는 대중성과 직관성에 더 추를 두었다면 장석남 시인은 대체로 지용과 백석과 미당으로 계승되는 서정성에 더 치중한다. 그의 시는 짧고 간명하지만 이미지가 분명하여 보다 詩처럼 다가온다.
5. 장석주 『오랫동안』
대표시 . 「금릉 가는 길 – 주역시편 8」
금릉 가는 길
장석주
해가 길어지니
온갖 영혼들이 영 점 오 밀리미터씩 촉을 내밀어
저마다 순한 그림자들을 기른다
아침나절 안뜰에서 뱀 세 마리를 보고
별자리를 보고 방을 짚다가
낮똥을 누러 들어간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버려라!
통발에 태고의 쇳소리
다섯 봉우리가 솟아 있는 땅
삼재(三災)를 견디니
태고와 멀지 않다
번개가 치고
검은 물이 밀려오는 물가에서
장자 읽기를 그친다
묘판에 유순한 새끼들을 길러라
사나움을 품은 마음의 날들이 돌아올 것인가
속내를 들키지 않는 들짐승이 되어
산 밖으로 나간 날
극단까지 가지는 않는다
날마다 목백일홍 經을 한 줄씩 외며
금릉으로 가는 꿈을 세 번째 꾼다
금릉으로 가려 하나
금릉은 참 멀다
멀리 있으니 없다
어젯밤에는 금릉을 찾으러 갔던
어린 슬픔이 돌아와서
함께 잠을 잤다
금릉에서 금릉을 찾으니
해가 더 길어진다
- 장석주 시인의 시집 『오랫동안』은 시인이 동양의 고전 사서오경 중 하나인 역경, 즉 주역을 보고 그 개념을 시에 비쳐 표현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은 미래를 예견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유교의 정통적인 이치를 가지고 사람과 우주를 설명하며 그 사이의 관계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고전이다. 합리적인 유학자들의 필독서였던 주역은 팔괘와 육십사괘를 설명하면서 정확한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다가올 순간에 대비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현명한지를 보여준다. 시적으로 주역을 표현한 것은 아닐진대, 시집에 상재된 작품들에는 하나같이 ‘주역 시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주역을 고스란히 차용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번 장석주의 시편들은 일종의 서사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현재를 돌아보며 그 힘으로 서정성에 기대고 있다. 다만 주역의 독해법이라는 것과 장석주 시인의 작품 독해법은 어느 정도의 교차점을 지니고 있다. 주역이 마치 싸구려 예언자의 그것처럼 정확한 판단을 내려주지 않듯이, 시인 역시 어느 현실을 보면서 그 기저로 다가가려 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관전하고 있다. 위 시에서 금릉이란 어디인가. 사소한 지명일수도 있고 누군가와 만나기로 한 약속 지점일수도 있고 혹은 어느 누군가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금릉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곳을 향해 도달해야만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다. 시인은 『장자』를 읽으며 금릉 가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저 일상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든 노자든 혹은 불교의 다른 고승들이든 깨달음(道)이란 나무하고 물 긷고 밥 짓는 등의 현실 자체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미 깨우쳤다고 설파한다. 시인은 낮똥 누고 물고기를 잡은 통발을 버리며 아무 것도 취하지 않고 그저 현실만을 살아간다. 길을 떠나지 않고 고요하게 머물러 있다. 먼 곳은 가지 않으면 되고 갈 필요가 없는 곳 역시 길을 재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 년을 돌로 산 그 사내 / 돌 속에서 우두뚝 무릎 관절 푸는 소리와 함께 / 벌떡, 일어난다 (「엎드린 사내 – 주역시편 543」)”. 시인은 박물관에 갔다가 어느 석공이 세공한 ‘엎드린 사내’라는 작품을 보게 된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 사람이겠지만 시인의 눈에서 그 돌사람은 시간의 경계와 금제를 풀고 벌떡 일어난다. 주역을 읽는 시인에게 시간은 건너갈 수 없는 벽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5천년의 세월이라 해도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과거는 지나간 미래(「뒤편 – 주역시편 327」)”라고 말하며 “먼 것은 가까운 것보다 멀고 / 가까운 것은 먼 것보다 멀다 (「거울과 계단 – 주역시편 203」)”라고도 말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삼세(三世)가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붙어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만 이치에 맞다. 미래는 언젠가 다시 숭고한 우주의 법칙 아래 다시 과거와 원인으로서 작용하고, 자신에게 가까운 것은 자신에게 먼 곳으로부터 더 멀다는 도교적인 생각이 장석주 시인의 작품세계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장석주 시인의 『오랫동안』은 마치 잠언 식으로 대부분의 상상이 출발한다. 의식 있는 자는 어떤 형상의 깨달음으로 이 상처입고 병들고 “이 슬픈 난생(卵生)의 삶 (「얼음과 서리 – 주역시편 134」)”들을 어루만지기 위하여 살아야만 하는가. 시인은 이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시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여기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혜안으로써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의 시세계는 사물을 지혜롭게 바라보는 어떤 눈이라 할 것이다.
6. 홍일표 『매혹의 지도』
대표시 . 「매혹의 지도」
매혹의 지도
홍일표
온종일 들리지 않는 노래 속에서 뒹굴다가
머뭇거리는 안개의 살을 만져보는데
손발이 없다 얼굴은 뭉개져 소리가 오가던 길도 지워져 있다
술잔 밖은 언제나 에로틱하거나 우아한 죽음을 지향한다
아주 단순하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다가 자주 생각의 허리를 부러뜨려 잃어버린 바늘을 찾기도 한다
예민해진 가을숲에서 부러진 빗줄기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만 리 밖에서 울며 걸어오던 비가 어제 죽은 허공의 등줄기를 적신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저곳
빈 동굴은 웅웅거리며 겨울바람의 붉은 마음을 여러 번 곱씹고 있다
접히고 구부러지고 다시 펴지는 사이
마음의 뼈에 유리잔의 실금처럼 풀여치가 다녀간 흔적이 남았다
나는 그것을 안개의 미세한 떨림과
그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남긴 한 획의 연민이라고 쓴다
저녁이 식은 해를 안고 불의 심장 속으로 들어간다
- 홍일표 시인의 표제시다. 매혹의 지도. 매혹적으로 누군가를 이끄는 방법이나 욕망 그 자체가 들어있는 지도일까. 그렇다면 그 지도 위에는 지명이나 도로, 나라의 경계가 나와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지도를 읽기 위해서라면 감각적인 수사학을 극도로 발현시켜야 할 것이다. 지도의 특성상 보이는 세계 자체가 워낙 광대하고 넓기 때문에, 그리고 한 곳과 다른 한 곳의 거리가 아무리 멀지라도 축척화되어 있어 불과 지도 위에서는 한 뼘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이 시에서는 여러 가지 대상들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매혹의 지도’란 사물화된 것이 아니라 그저 시인의 상상세계의 어느 지점에 존재하고 있는 상념을 넓게 펼쳐놓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의 생각과 시야는 어디로든 가 닿고 그 위치에 대한 것을 시적으로 부려놓는다. 그러므로 지도는 다시 변화한다. 그 위에 적힌 내용들은 시인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매번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손발도 얼굴도 뭉개진 안개의 얼굴처럼 시인의 내면을 탐험하는 일은 무척이나 모호하다.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 어느 주점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지만 그 대상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가진 어느 여성으로서만 추측될 뿐 독자들은 이 지도 위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곳저곳에서 시인의 상념들이 모호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직 표제시만이 아니라 시집 속에 상재된 다른 시들도 시인의 상념이 따르는 궤적을 어렴풋이 내비쳐주고 있다.
“갑자기 발밑이 사라져 / 매일 보는 어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위험한 풍경」)” 세계에 갇혀 방황하면서 시인은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장난감 말 (「우주선」)”이 되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흑암의 공간에 지배된다. 하여 “그늘만 찾아다니며 몸을 의탁하는 / 잔설 (「새의 행로」)”의 이미지에 편재되어 한 성당의 사제가 내민 손바닥 위에 내려앉기도 하고, “죽은 바위 속으로 밀항 (「비상구」)”하기도 한다. 어쩌면 시인은 자기 상념의 미로에 갇힌 채 출구를 찾으러 방황하고 있는 자아일지도 모른다. 시의 문장들은 대체로 화려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통로인 것처럼 보이던 길도 다시 보면 막다른 길이며 어디론가 몸을 뉘일 장소를 찾아 헤매는 일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지도에서 찾아내고 싶어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시인은 애써 사물의 이면을 찾거나 뒤섞이고 왜곡된 본질을 찾기 위해 대상의 뒤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의 눈에 모든 대상은 들어갈 수 있는 문임과 동시에 그의 의식을 내치는 벽이기도 하다. 시인이므로 그는 시를 찾아 헤매는 중이리라.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에서 평생 들고 다닌 돌도끼 (「원시인」)”를 손에 넣기 위해 두리번거리면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상념들을 대파하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본질과 왜곡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이미 시인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고보다는 상념의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의 발걸음을 이끌어주는 지도는 아주 원시적인 것(미개한 것이 아닌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에 시인도 모르게 편재되어 있다. 그리고 시의 힘으로써 시인은 기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7.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대표시 .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 13월에게」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김선우
우리 종족의 피가 네 종류뿐이란 게 부끄러워요
더 많은 피의 비밀이 있을 텐데
고작 네 종류밖엔 감당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네 종류 피는 질서 유지의 한도
네 종류 피 속에 숨어 있는 팔만사천가지 비밀 얘기들이 궁금해
나는 戰士가 되었어요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
저 새의 혈액형을 알아다 주세요
내가 사랑하는 돌고래의 혈액형
귀여운 펭귄과 신비한 늙은 코끼리의 혈액형
아카시아잎 오물거리는 푸른 자벌레의 혈액형
기린과 오로라의 혈액형, 나를 홀리는 모든 존재들의 피가 궁금해
어젯밤 씨실리에 떨어진 운석에 묻어 있는
얼음 종족 당신의 혈액형도 알려주세요
당신에게 헌혈할 수 없어 안타까워요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
내게 남은 몇 번째의 12월인지 알 수 없으니 건배!
팔만사천가지 혈액형이 반딧불처럼 발광하는
13월을 불러줘요 내 피를 마저 줄게요
- 김선우 시인의 이전 작품세계는 여자의 고뇌와 여린 육체 그리고 욕망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 여자란 누구이고 여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세계에 어떤 작용을 하는가. 성욕과 오르가슴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고뇌를 한 흔적이 보이는 시인이었다. 문단에서는 김선우 시인의 노력을 가리켜 ‘여성 몸의 담론’이라 평한다. 이전의 김선우 시인은 폭탄을 두르고 마지막 길을 떠나는 오빠를 전송하는 팔레스타인 소녀(「제비꽃밥」『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나 무당의 딸로 태어났다가 팔려간 일정시대의 위안부 소녀(「열네 살 舞子」, 시집은 옆과 동일), 석유전쟁으로 인하여 내전과 고통이 끊이질 않는 나라의 어린 아이들을 연민하는(「피어라 석유!」) 내용을 다뤘다. 상처로 가득한 여인이 제 몸이 부르는 色으로의 욕망을 말하거나(「도화 아래 잠들다」, 『도화 아래 잠들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요의를 느끼고 소변을 누는 여성의 편안한 자태(「오동나무 웃음소리」, 시집은 옆과 동일)를 다루는 등 여성의 육체에 대해 시적으로 관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봄에 출간한 시집『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아마 시인 스스로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분야를 창조하는 듯한 의지가 나타난다. 무한한 혁명에게, 라는 말에서 문득 최영미 시인의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이 진부해졌다’는 대사가 얼핏 떠오르기도 하지만 분명 이번 시집은 이전의 내면세계를 관찰하던 것으로부터 한 폭 도약에 성공하고 있다. 서정성과 여성성을 드러내던 이전 세계에서 보다 과감하고 실험적인 어휘들을 구사해나가는 중이다.
표제시인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 13월에게」에서 시인은 여자를 화자로써 내세우기는 하지만 인류를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정리하고 구분할 수 있는 혈액형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과연 인간만이 고유한 성질을 갖고 태어난 완전체인가, 하는 상상과 물음을 던지고 있다. 피는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동물적 생명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리고 A, B, O, AB형 등으로 네 가지의 혈액형이 구분된다. 하지만 피는 그저 피 자체인 것. 혈액형은 단지 피의 생물학적 속성이나 상호간의 수혈이 가능한 지와 불가능한 지를 나누기 위해 사람이 만든 것이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다. 새와 코끼리와 자벌레와 기린의 피에도 사람의 것과 동일하게 구분할 수 있는 혈액형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범주 외적인 물음과, 황홀한 모습으로 시인의 눈을 끄는 극지방의 하늘에 아름답게 펼쳐지는 오로라의 내부에도 그 전기적인 작용을 구분할 수 있는 상징이나 원천이 있을 것인지와, 더 나아가 시실리에 추락한 운석 표면 혹은 내부의 얼음 속에 들어있을 외계인에게도 과연 혈액형이 있는지를 질문한다. 시인은 피 속에 들어있을 어떤 마법적 주문과도 같은 비밀을 알기 위해 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얼음종족 외계인에게 헌혈/수혈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외계인의 혈액형이 AB형이라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거나 인류의 혈액과 아예 다른 종류-이를테면 초록색?-라면 B형 여자의 피는 항원의 감염 탓에 결코 수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피는 인간에게 생명력을 주는 원천이 됨과 동시에 다른 종(種)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 13월이다.
열두 번의 달(月)이나 붉은 피나 모두 인류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외계인들의 세상에는 13월이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시인은 13월이 있는 외계인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해줄 것을 원한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긍정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부분을 건드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존재하지 않음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실존으로 하여금 높은 단계로 도약하게 만들고 있다. 하여 김선우의 시는 존재와 비존재를 한 번에 자신의 시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혁명과도 같다. 그 혁명은 무한히 지속될 것이다. 시인이 비로소 자신의 승리를 인정하고 자신의 상상이 가 닿을 수 있는 모든 존재에게 영혼을 공유할 때까지.
8. 임동확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대표시 .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날갯짓을」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날갯짓을
임동확
새들은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습관처럼 자신의 무게를 측량해보면서
연신 내려앉는다 흔들리는 만큼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날개를 퍼덕이고
제 몸피를 감당하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가녀린 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후박나무 한 가지를 가만 붙들고 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버리고서
그 어디서 잠시나마 고단한 날갯짓을 쉬어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 또다시 덫이자 먹이의 허공으로 솟구쳐 나갈 수 있겠는가며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새소리를 연신 한숨처럼 토해내고 있다
이내 작은 날갯짓에도 자주 불안하게 요동하는 나뭇가지 위에서
날아오르려는 그만큼 무겁고 완강한 중력의 손아귀에 이끌려
끝없이 따라 흔들리면서, 어떻게든 흔들리지 않을 접점의 부축을 받아
새들은 아침이면 또 어김없이, 거부해야 할 정지의 굴레이자
언제든 떠나갈 운명의 둥지 위에서 하나 둘씩 속깃을 다듬고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저물녘이면 미처 돌아오지 않은 자를 기억하며
한바탕 소란스레 나뭇가지를 요령처럼 흔들면서 또 흔들리는 새들이여
아무도 쉬 장담하지 못하는 평화가, 안식이 그렇게라도 찾아온다면
흔들리면서 끝내 흔들리지 않은 사랑이 그렇게라도 꽃필 수 있다면
-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기에 앞서 후박나무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숲의 공간 속에 머무르고 있다. 날개를 쉬면서 다시 날아오를 기회를 얻기 위함이다. 시인은 잠시 쉬어가는 새의 모습에서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바람이나 중력이 새를 나무에서 떼어내려고 하지만 새는 요동치는 나뭇가지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완강하게 붙들고 있다. 언젠가는 떠나겠지만 새의 휴식을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다. 시인은 그런 모습을 보며 문득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흔들리면서 끝내 흔들리지 않으려는 시인의 발은 어느 땅에 붙어있는 것일까. 시인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머물러 있다. 어쩌면 자기 스스로가 결정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시집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를 상재한 임동확 시인은 광주 5·18 민주항쟁을 알리기 위하여 그 당시 참여주의 문인들이 그러했듯이 당시의 기억들을 주로 시에 써온 작가다. 시인은 서정적인 잠언 투의 억양으로 과감하고 참여적인 입지를 구축해왔다. 그런 탓에 그의 시는 대부분 길거나 리듬을 고려하지 않는다. 할 말만을 쓰는 게 아니라 가슴에 차오른 응어리를 정제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표출해낸다. 시인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문학적으로 투쟁해왔고 지금의 상태를 제목에서 표현하고 있다. ‘나는 오래 전에도 여기 있었다.’ 지금은 그가 무너지기를 간곡하게 염원해오던 군정시대가 몰락했지만 그의 영혼은 아직도 젊은 시절의 한때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인지 다른 시편들도 대체로 서정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면서 동시에 과거의 청춘에 대한 어떤 회한 같은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는 시 속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로 가서 비밀경찰에게 쫓기기도 하고 도달할 수 없는 금기의 땅을 밟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영혼을 이동시킨다. (「지금 나는 모스크바로 가고 있다」). “제대로 된 긴 전망 하나 없이도 / 끄떡없이 저 피의 세기를 건너왔느니 (「고별사」)” 시인은 문득 싸움과 투쟁이 문학적으로 연대하던 청춘의 시기를 통과해온 자신이 대견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하여 임동확 시인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천착하는 작업과 함께 서정적인 표현의식으로 회귀하려는 듯 보인다. 시인의 의지 같은 것을 드러내보이는 시집이다.
9. 박정대 『내 청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대표시 . 「馬頭琴 켜는 밤」
馬頭琴 켜는 밤
박정대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약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 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와 별빛을 매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었던가, 오래된 해방구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의 언덕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두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 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이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창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馬頭琴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으로 밝혀놓고 홀로 馬頭琴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 박정대의 시는 낭만적인 연애시의 원류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적 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내몽골이나 신장 위구르 지역의 황량한 사막이다. 마치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의 배경인 사막처럼 박정대의 사막은 모래바람 속에 이는 슬픔과 영원히 유랑할 운명에 놓인 가련한 시인의 영혼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특히 몽골의 사막에서 끝없이 유랑하고 싶어 하는 고독의 시인이다. 때문에 박정대의 시편들은 마치 옛날의 낭만주의 연애시처럼 길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수사문들로 가득 차있다. 몽골의 대초원을 건너 타클라마칸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행자의 마두금이라는 몽골의 거문고 비슷한 악기를 켜면서 박정대 시인은 모래바람과 높다란 언덕들을 제 마음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황량한 지상 위에 자신은 초라하게 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 목숨을 걸고 횡단하고자 했던 메마른 사막을 거닌다. 모닥불을 가리켜 대초원의 촛불이라 한다. 모닥불은 분명 여행객이 극저온으로 떨어지는 사막의 밤공기를 이겨내기 위해 피워놓는 것일진대, 시인은 이를 사막의 전체를 밝히는 촛불로 확대하고 있다. 사막은 여행자 자신이며 여행자는 점점 유사 속으로 가라앉듯이 내면을 고독하게 밝히며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대의 시는 무수한 관념으로 가득하고 시의 분량이나 행의 길이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순간적인 감상이나 관념만을 노래하는 「室內樂」의 경우 104편이나 되는 짧은 연작들 때문에 이 시가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지 지나치게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의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을 축하하며 심사위원인 김광규 시인은 “외마디 소리나 아포리즘 같은 단문을 100여 개씩 늘어놓는 불연속의 「室內樂」연주는 절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정대의 연작시들이 갖고 있는 그야말로 불연속적이고 불확실하며 애매모호한 성향들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사랑과 낭만의 기억 속으로 발을 담그도록 만드는 애절한 문장을 귓가에 어른거리게 만든다. 그는 서정성과 실험성 모두를 취득하되 한 가지를 결정해야만 한다면 서정적인 사랑노래를 선택할 것 같다. 독자들에게 생소한 영화배우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차용하며 겉멋을 부리는 근래의 미래파 시인들이 겪는 오류가 그에게도 약간은 존재한다. 하지만 끝까지 아름다운 시적 언어의 조탁으로써 사막과 자기, 자기와 먼 사랑의 기억, 그리고 몽골만이 가지고 있는 유랑하는 영혼들이 서로 몸을 기대면서 이루어지는 낭만의 첩경을 괄목할 만하게 전개해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강렬하다.
그는 사막 속에서 여행자이거나 아니면 황량한 사막의 기억을 맡으며 떠도는 한 마리의 늑대 같기도 하다. 사막을 노래하지만 결코 고요한 감각만을 불어넣지 않고, 고독한 검객과 같은 느릿느릿한 자세의 화자를 불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막의 이편과 저편을 순식간에 가로지르는 재빠른 인식들이 드러난다. 박정대의 시는 어렵게 독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문장을 음미하는 하나의 감정만 있을 따름이다. 절제보다는 폭발적이면서 독자들이 큰 불편 없이 마음속으로 전부 들여보낼 수 있는 뛰어난 문체가 인상적이다.
10. 남진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대표시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남진우
시체들
시체들
시체들의 속삭임 속에서 잠든다
시체에서 새어나온 썩은 물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와
몸 속의 피를 검푸르게 물들이는 밤
사방에서 시체들이 속살거리는 소리
눈먼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얼어붙은 입으로 끝없이 주절대는 저들의
낮고 혼곤한 소리
시체들
시체들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채
문드러진 손톱으로 끝없이 벽을 갉아대는
막막한 밤의 저 길 잃은 유령이
사방에서 몰려와 내 목을 조른다
나는 외친다
나는 외친다
나의 외침이 목구멍을 찢고 입술을 찢고
이윽고 얼굴 전체를 찢으며 번져나간다
산산이 찢긴 얼굴이 허공에서 소리소리 지른다
시체들
시체들
시체들의 속삭임 속에서 깨어난다
한 입 가득 시체 썩은 물을 물고 온 세상이 찢어져 나갈 비명을 지르며
무더운 여름밤의 혼곤한 잠에서 빠져나온다
-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제목으로 차용했다. 남진우의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속에는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가 일관성을 갖추고 시에서 발현되고 있다. 마치 영화 속 남매를 쫓아다니는 시체들의 모습처럼 ‘시체들’이라는 단어가 별행(別行) 처리되어 꼿꼿하게 직립하는 느낌을 준다. 시 속의 화자는 죽은 시체들에게 쫓기고 있고 이로부터 해방될 기회는 앞으로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거의 원작 영화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아무도 화자를 구해줄 수 없고 시체들은 마치 故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처럼 느릿느릿한 좀비가 되어 걸어오고 있다. 남진우의 시집 속에서는 화자에게 이 두려움에 맞설 권능이나 우연한 기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의 이미지들,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자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에 대한 원한과 원망으로 모든 시편들이 얼룩져 있다.
남진우는 거의 잡아먹히거나 죽은 자에게 점령되기 직전의 불행한 생자(生者)에게 시로써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이 추악한 운명에서 건져올리길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공포라는 자의식이 사람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타락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산 자와 죽은 자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살아있는 자를 기준으로 일방향성을 지닌다. 산 자가 죽을 수는 있지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그러나 남진우의 시편에서 죽은 자는 생명력을 얻고 산 자를 위협한다.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나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같은 시집에서나 나올 법한 상념들이 무더기로 등장한다. 시편들 도처에 제대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대상들이 없다. 나무는 피를 흘리고 그 밑에는 누군지 모를 한 시체가 있고 (「공원묘지」) 죽은 자들이 지하에서 웅얼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화자는 혹시 시체들도 머리카락과 손톱이 무성하게 자라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완전히 항복한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달빛 속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서거나(「밤」) 죽은 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목소리 – 심야통화」) 사자(死者)들을 태운 배가 집 앞에 도착하는 (「검은 돛배」) 식이다. 남진우의 시집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가깝게 다가온 공포와 계속 다가오고 있는 더 거대한 공포의 자의식 속에 함몰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감에 완전히 백기투항 해버린 화자의 나약한 영혼을 어떤 시선으로 관조하고 때론 증명하는지를 일관성을 유지하며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산 자들은 서로를 죽이기에도 너무 바쁜(「증언」)” 이 세상에서 만약 죽은 자까지 산 자의 생명을 취하기 위해 다가온다는 시적 현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시인의 상징세계 속에서는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살해(殺奚)는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부여된 일종의 독자적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회성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생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죽은 자들이 생명의 구역을 침범해 들어올 때 독자들은 피비린내와 시체 썩은 냄새가 주는 공포에서 불가능성이 갖고 있는 매력을 발견한다. 기형도가 자기고백적인 연민과 우울을 보여주고 있다면, 남진우는 어떤 불가해한 상황을 시적 공간에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독자들의 상상과 예측 그 이상으로 죽음의 공간을 현실에 형상화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