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자 : 민용태(시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박남철(시인), 홍영철(시인), 허혜정(시인, 문학평론가)
사회 : 고두현(시인, 한국경제신문 기자)
일시 : 1998. 04. 30
장소 : 한국詩문화회관 부설 PoemHouse 회의실
고두현 : 90년대에 나타난 문학속의 에로티시즘에 대하여 그 표현과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주제로, 시 / 공간에 제한없이 토론했으면 합니다.
민용태 : 오늘 신문을 보니까 아르헨티나에서 백인들이 가장 혐호하는 사람이 한국인이라고 나왔더군요. 왜 그런가 하니, 한국사회의 지나친 폐쇄성 때문이랍니다. 폐쇅적이라 함은 관습과 무지가 설치는 곳인데, 그런 의미에서 정말 우리 사회는 쓸데없이 폐쇄적입니다. 이는 문화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문화에 대한 낮은 관심속에서,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문화가 재단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시를 모르면서도 시를 반박하며, 소설을 모르면서도 외설적이라고 공격합니다. 이처럼 ‘음란’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규제도 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봅니다.
허혜정 : 민선생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문학 안쪽에서 에로티시즘 논쟁을 바라볼 때, 에로티시즘 논의 자체가 너무 들뜨지 않았나 싶습니다. 에로티시즘하면 천편일률적으로 섹스, 육체 이런 것들만 얘기되는데 이른 성을 표피적으로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은 근원적인 에너지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언어, 사고방식과 같은 내면 깊은 곳이 성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죠. 우리 의식에서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존재하며, 그것은 상보적이고 대등한 관계에서의 에너지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이 만든 제도를 넘어선 근원적인 에너지의 흐름인 것이죠. ‘무엇이 성적인가’라 했을 때 단지 표면적인 의미에서 규정할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홍영철 : 문학은 사람이 사는 모습을 담는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삶이 ‘서이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면 인간의 역사는 ’성‘에 의해서 지속돼왔다고 얘기할 수 있는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인간행동의 모든 것을 ’성‘과 연결시켜 풀어냈습니다. 성의 역사는 정치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그만큼 인간의 역사와 삶은 ’성‘의 문제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성‘을 오픈하지 않고 폐쇄하고 자꾸 숨길려고만 합니다. 겉으로는 ’성‘을 부정적으로 얘기하면서도 그 뒤에서는 돈만 주면 어디서든 ’성‘을 사고 팔 수 있을 만큼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것과 그 이면은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지 도덕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며, 청소년 문제 / 성범죄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은 오픈되어 활성화시켜야 하지, 금기시 되거나 규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니다.
허혜정 : ‘성’을 단지 제도적인 측면에서 구제하는 대상으로 그 범주를 한정할 수 만은 없습니다. 제도적 규제를 받는 코드화된 성은 이미 퇴색되고 변질된 ‘성’인 거죠. ‘성’ 이라 함은 삶 속의 중요한 에너지로서 규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얘기해야 할 것은 제도와 법적이 규제보다 인간의 아름다움과 근원 에너지로서의 성이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사회(고두현) : 최근 90년대 문학에서 에로티시즘 논쟁에 관련하여 젊은 작가들 배수아, 백민석, 김영하가 주로 거론됩니다. 그들의 작품 속에서 과연 ‘에로티시즘’의 문제가 어떻게 변형되고 나타나고 있는지 작품을 예로 들어보며 얘기해 봤으면 합니다.
박남철 : ‘성’이라는 용어 자체도 저로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이 자리가 무슨 학술 토론회 자리도 아니고 말입니다.) 저는 대신에 ‘씹’이라는 용어를 한번 사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로 적어주세요. 사람을 신과 동물의 중간자적 존재라 할 때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하부 구조 없이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상부 구조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하부 구조로서의 인간은 개체의 생존을 위해 ‘밥’을 먹고, 그 ‘밥’이라는 형태로 몸에 들어온 에너지‘를 우선 두어 가지 형태로 발산하게 되는 거죠. 바로 일과 놀이 또는 씹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굉장히 중요한 순환 기제로써의 인간 생활입니다. 이는 ’자연‘으로서의 ’에너지‘의 피드백 시스템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사회가 이를 제도적으로 보호를 해주어야 합니다. 결국은 문학 자체도 ’에너지‘ 발산의 한 유형이겠죠. 좀 쑥스럽기도 합니다만, 제가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밝혀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면, 저 우리의 ’팔씹년대‘ 이후, 우리 세대에서, 출판물의 ’외설성‘이란 것으로 인해 최초로 규제를 받은 사람은 바로 저 자신과 박덕규씨라는 사실입니다. 1982년 <청하출판사>에서 낸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라는 박덕규씨와의 공동 시집으로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인가 뭣인가 하는 곳으로부터 “경고 조치”란 걸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 시집에는 ’개의 자식‘, ’개의 새끼‘, ’똥‘, ’보지‘등등의 일종의 비시적인, 당시로서는 매우 점잖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표현들이 들어있었던 셈인데, 저로서는 “경고 조치”란 걸 내려주신 매우 점잖지 못한 분들을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그 출판사의 사장이시던 장석주씨가 매우 곤혹스러워하는 듯도 하여 속으로는 꽤나 미안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기도 합니다. 그후 <민음사>에서 나온 『반성』이란 시집으로 김영승씨가 ’세계 최초의 외설 시집‘을 낸 사람이 되어 ’AP통신‘과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바도 있으며, 그 다음이 역시 <청하출판사>가 낸 마광수씨의 (즐거운 사라)였는데, 이 마광수씨의 경우 출판사측과 작가측이 명백히 실정법 체계에 도전해보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엿보이기도 하여 좀 미묘하기도 한 문제이기도 하였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그 당시의 실정법 체계를 단지 몇 사람의 검사들과 법관들만의 의견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지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그야말로 ’빌라도‘였을 뿐이지, 적은 오히려 우리 문학 내부에, 그리고 출판사 측과 마광수씨 자신 안에 있었다고 보아야 더 정확한 사태 판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다음이 장정일씨의, 저는 읽어보지도 못한, (내게 거짓말을 해봐)였던 셈인데, 장정일씨 역시 마광수씨처럼 실정법 체계와 명백히 정면 대결을 해보겠다는, 문학사적인 장렬한 산화를 한번 해보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저는, 마광수씨의 “젊은 피”만으로는 만족 못해, 진짜 젊고 재능 있는 새로운 작가인 장정일씨의 “악의없는 어린 피”까지 핥아먹어버린 우리의 늙고 낡아빠진 기성 제도권의 점잖지 못함에 대하여 아직도 통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 이후 다시, <열음사>의 김수경 선생께서 이미 자사내에서 출판이 되어 있던 외국 만학 작품집 두어 권을 표지 디자인을 다시 바꾸어 출판했다는 이유로 ’출판 등록‘이 취소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죠. 결국은, <열음사>와 김수경 선생의 경우는 삼척 동자가 들어도 웃을 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던지 종내에는 법정 투쟁에서 “최초의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는 했었지요. 하여튼, 어쨌든, 이런 식으로 어느 시대에나 어느 경우에나 제도권과 작가와의 충돌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에로티시즘 문화‘ 또는 ’씹 문화‘의 영역과 그 수준은 가히 아프리카의 그것보다도 자연스럽지가 못하며, 구미의 그것보다는 살인적으로 자유스럽지 못하며, 일본의 그것보다는 창피스러울 정도로 세련되어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제도권에서부터 점점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줄 것으로 기대되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부터가 우리 사회의 의식 구조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나 지배 이데올로기들까지 다독거리고, 설득하고, 싸워나가는 일을, 감싸안는 일들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일일 것입니다.
민용태 : 문학에서의 표현이 제도적 규제를 받는 것은 도덕성을 넘어서서 문학부재 현상입니다. 도덕적 성이란 생식적 목적만을 위한 성으로 규정하는데, 인간의 본질이 동물성과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 ‘에로티시즘’이죠. 생식이상을 넘어서서 ‘쾌락’을 위한 번수가 많은 것이 인간의 성행위인데, 동물의 성적 범주를 인간에게 적용하여 인간을 규제하는 것 자체가 역설입니다. 지금까지 지배해온 남성중심적 문화에서 생식중심의 ‘동물적’성을 중심으로 한 출발부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제는 인간의 생명성과 삶의 구도가 새로 조명되는 시점에서 ‘성’은 다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로, 우주와 음양의 조화적 원리로서 ‘에로티시즘’이 정의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성’을 제약하는 모순된 원리가 문화 전체를 경색하게 만든 가장 주된 원인이죠.
사회(고두현) : 지금까지는 표현의 문제와 관련해 사회적 금기로서의 ‘성’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어봤습니다. 제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90년대 소설속에의 성’이라고 해서 <문학동네>에서 봤는데, 최근의 문학 표현은 ‘가벼움과 쾌락만을 추구한다’, ‘너무 개인적이며 비사회적이다’, ‘이성과는 반대되는 다른 감정만을 대변한다,’등의 이러한 이유로 질타받는데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혜정 : 앞에서 장정일을 비롯한 ‘신세대문학’의 포르노그라피적 경향을 얘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론 송경아, 배수아 같은 작가들은 에로티시즘을 잘 모르는 작가들입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어떤 여자가 자신의 삶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 막연히 섹스하는 것을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자기확인이라는 주체의 문제가 됩니다. 성을 문학적 전략으로 채택했다고 하나 화자에게 들려오는 ‘신버지’의 목소리는 제도에서 만들어진 성억압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주 원초적인 우주의 목소리입니다. 보다 더 깊은 인간의 내면에 침잠된 문제이며 세계의 문제인 거죠. 에로티시즘은 인간이 만든 제도를 넘어서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 지금의 시대죠. 정사씬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에로티시즘이라고 할 수 없죠. 좀 더 근원적인 시각으로 작가와 시인이 천착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용태 : 오늘날은 스포츠와 섹스가 현대성을 정의합니다. 문학에서는 추한말 쓰기부터 현대성의 통로가 뚫렸다고 봅니다. 예쁜 말, 추한 말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말이 어떻게 쓰여지는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터부가 깨지고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추하게 쓰여지는 것이 지금의 문학적 풍토죠. 또하나, 성은 존재의 의미탐구를 위해 실존의 문제로서 현대문학에서 다루어지는데, 까뮈의 ‘이방인’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섹스’를 합니다. 즉, 실존을 향한 몸부림으로 성이 다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탈구조주의 형태로 말논리의 허상을 고발하기 위해 성의 묘사가 나옵니다. 이것을 ‘그림자적 글론’ 또는 ‘간텍스트문학’이라 합니다. 지금까지는 현대문학의 조류속에서 성의 표현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얘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학의 양태인 것인데, 이런 것을 법제도로 막겠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 빈곤 상태를 말해줄 뿐입니다.
허혜정 : 에로티시즘이라는 것은 현재 공간 안에서 자기욕망을 흘러보내는 방법인데, 흔히들 에로티시즘 하면 떠올리는 것이 에이즈, 강간, 성폭력입니다. 이것은 에로티시즘과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작가들 역시도 작품 속에서 아무리 능란하고도 관능적으로 성을 다루더라도 현실에서는 꼴사나워짐을 알고 있습니다. 문학에서의 글쓰기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는 하나 문학과 현실에서 경계각 구분되는 선에서 자유논리를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용태 : 깊은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을 규정해보자면 여성의 성은 다발적이며 삽입이나 오르가즘과는 다른 쾌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페미니즘문학에서는 전혀 포르노적 요소 없이도 에로틱함에 젖어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의미주기, 논리주기, 상징주기와 같은 전통문학의 표현과는 다른 의미로 나타나며, 이것을 편의상 다양한 성이 나타난다라고 할 수 있겠죠. 여성의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깊은 에로티시즘은 문제가 안 되겠죠.
박남철 : 우리의 고전 문학에서도 논의의 화두는 찾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양반 문학 또는 사대부 문학의 전형이었던 시조의 정형성을 ‘외설성’을 섞어가면서까지 파괴해버린 것이 사설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고려 가요 역시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폐기 처분: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많았다고 기록에 명백히 나와 있는 현실이 있기도 했습니다. 판소리에서도 지배층 지배층 문화 내지는 사대부 문화를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지만, 당시의 지도층 즉 양반들은 매우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우리는 추정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그 어떤 제재도 함부로 가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민중들의 ‘놀이’ 또는 ‘씹’의 ‘에너지’를 제대로 승화시켜주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삿갓 같은 우대한 시인은 아예 ‘局外人(국외인)’이 되어 양반 문학과 민중 문학을 함께 아우르면서 ‘성’, 아차, ‘씹’의 언어를 이용한 문학적 수사를 배꼽이 빠질 정도의 해학으로 적나라하고도 의미 있게 묘사해놓은 바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도 ‘씹 문화’에 대한 제도적 규제가 있었다면 있었고, 없었다면 없었떤 시절이 있기도 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유츄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반상’의 ‘표면적 계급 사회’가 무너지면서, ‘이면적 계층 문화’가 또한 형성되어 있던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 아니할 수도 없을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는 크게 ‘고급 문화적인 현상’과 ‘대중 문화적인 현상’이 두드러지게 길항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도 엿보이는 면도 있어서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겉으로는 제법 우울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더없이 통쾌하고 유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도 간혹 있기도 한 것입니다. 최근의 ‘대중 문화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내주고 있는 면도 있다고 판단되기도 하는 ‘PC통신’에서도 느끼는 일이지만, 글 제목에 ‘씹’과 관계되는, 그 비슷한 어휘만 들어가도 ‘조회수’는 기가 막히게 마구 올라갑니다.(이건 남녀노소의 구별, 차별도 없어보이는 현상입니다.)이것은 현대의, 최근의, 대중들의 관심이 늘 ‘씹’에 가장 많이 쏠리고 있다는 증좌가 아닐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근의 세칭 ‘구씹년대’작가들이나 젊은 시인들은 ‘칠, 팔씹년대’의 선배들의 선명했던 정치 투쟁이나 이념 투쟁 혹은 의식화의 통과 제의에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바라던 바의 민주화의 성취가 어느 정도는 이룩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과도기적인 세대’들로 보이기도 하는 면이 있습니다. 어차피 선배들처럼은 살기 실은 게 후배들인데, 이제는 ‘정치’나 ‘사회’ 따위에는 씬물이 다 났겠지요. 그리하여, 씬물이 다 났으니까, 쓸게 없으니까, 어쩌면은 속았다 싶기까지 할 테니까, 당연히 젊은 패기로써의 ”씹의 문제“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면도 어느 정도는 진실일 것입니다. 법과 공권력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싫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의 최소한”으로서의 최후의 보루는 어쩔 수 없는 “필요악”으로써 필요하다고도 봅니다. 어느 정도의 규제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알들 발해미르 군이 올해 중학교 1학년 생입니다. 이 어린것의 주변에는 텔레비전에서부터 스포츠 신문에 이르기까지, 케이블티비에서부터 컴퓨터 오락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씹의 네트워크”가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제 아이가 너무 일찍 “씹의 문제”그 자체에 눈을 뜨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때 국정 교과서에서 우리 황순원 선생님의 (소나기)를 읽고서 받은 그 “순수한 충격”정도를 제 아이는 중학교 1학년 정도에, 그러니까 올해 정도에 받아도 좋다는 시대적 변화를 인정할 마음의 준비 정도는 저도 되어 있습니다만. 그리고 새 정부, 이른바 ‘국민의 정부’ 이후 “씹”의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무식한 규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뭘 제대로 모르는 자들이 반드시 매를 들어야만 교육이 된다고 생각하곤들 하지요. 오히려 진짜로 무서운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일 것입니다. 심약한 아버지가 매를 너무 자주 들게 되는 것이며, 도리어 이것이 그 아버지의 심약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이들이 반항할 때가 더 많아지는 것이라고 저는 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제법 너그러운 선배인 척, 또 그 무엇인 척 해왔지만, 꼭 한 가지 정도만은 자격도 없는 선배로서 지적드리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도대체 요즘 젊은 작가 분들은 아무른 필연성이나 개연성 없이도, 마치 고대 소설이 우연성을 남발하듯이, 상황과 장소 그리고 분위기와 때에 전혀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씹얘기”를 마구 해댑니다. 마구 박아댑니다. 마치 그것만이 이 땅에 태어나 할 일의 전부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저희의 ‘팔씹년대’에는 지면이 귀해서 하고 싶은 말만 해도 지면이 모자라서 쩔쩔맸을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너무나도 자유로운, 자유 방임의, “케쎄라쎄라”의 분위기인 듯도 합니다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고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니 수많은 잡지사들과 출판사들이 이 유일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임시 방편으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의 아까운 젊은 작가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아니, 이용만 해도 괜찮겠지만, 아예 망치고 있다, 고 판단되는 면이 있기도 한 것입니다. 무슨 얘기를 해야 가장 손쉽게 잘 팔릴 것인가? 당연히 ‘씹얘기’이겠지요, 뭐...... 제 나이 이제 사십대의 중반에서, 문단의 ‘위’와 ‘아래’의 가운데에서 우리의 ‘아래’세대들을 한 번 내려다볼 때, 일단 제가 소속되어 있는 시 부문으로 이젠 국한해서 말해볼 때, 우리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고 있는 ‘에로티시즘’ 혹은 ‘씹소리’들은 별 이유 없이 그야말로 별 재미없어 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면도 더러는 눈에 가끔 띄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려면 화끈하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하지를 말든지, 아니면 곱고 아릅답게나 하든지, 그 어떤 선택적 자율이 제발 이젠 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한 시인이 한평생 ‘씹얘기’만을 할 수는 없을 테니 그 점에서는 적이 안심이 되는 바가 없지 않아 있기도 합니다만.(한 시인이 한평생을 ‘씹얘기’만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역시 하나의 “길”은 길일 테지요?)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