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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의 조우에서 '근대' 너머로의 항해 - 한국시문화회관 - 문예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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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식, 정보, 중요한 자료들을 편집자들이 집필해 놓은 공간입니다.

'근대'와의 조우에서 '근대' 너머로의 항해

 

 

김민구

(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여기 오랫동안 학자들의 쟁론을 부추겨온 문제가 하나 있다. 과연 우리 역사에서 근대(近代)’란 무엇인가? 전근대(前近代)와 탈근대(脫近代)가 정확한 시대적 구획으로 재단되지 않는 것은 그 중심축인 근대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이 전환기로서의 성격, 환언하자면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경계를 가늠해보려면 일단 조선 말기에서 일제 식민시기를 경유하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해야할 것이다. 일단 중국으로부터 전승해온 주자(朱子)의 성리학적 지배와 신분질서가 서서히 폐지되면서 서구 열강의 문화를 유입한 시기를 잠정적으로 근대의 시작으로 분류해볼 수는 있으나, 이 또한 명백한 정립으로 확정하기엔 어렵다. 근대 문물의 수용과 확산을 시기적으로 명확하게 고정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 서구 문물의 조선 도입에 대해 핵심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고종시대사2에 따르면,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는 조미통상수호조약 이후 1883(고종20)1호가 발행되었고 8월에 인쇄사무를 관장하는 박문국(博文局)이 설치되었다. 전화는 18824월에 도입되었고, 전기는 188736일 경복궁 항원지 연못 옆 건청궁에 미국 에디슨사의 전등에서 최초로 밝혀졌다(노형석), 외국어 교육이 이루어진 육영공원(育英公院)18884월 고종의 친림 아래 첫 입학시험이 이루어졌으며 미국인 교사의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서명일). 그러므로 경술국치(1910) 이후 해방 직전까지를 관통하는 일제 식민시기는 전술한 근대화 이후 30여 년이 흐른 때 시작된 것이며, 서양의 도시 및 생활 체계 전반이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 상당 부분 옮겨진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착종에 대하여 임화(林和)이식(移植)’이라고 불렀으며, 이원조는 상허문학독본의 발문에서 새 시대의 사조는 갑자기 밀려들어 사상은 포만을 느꼈으나 문장은 빈혈을 면치 못하던 때(김윤식)라고 말한다. 1881년 고종의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이었던 유길준은 "전깃불이 '악마의 힘'으로 켜진다"라고, 그리고 1884년 봉명사신(奉命使臣) 중 하나인 박대양이 모스의 유선 전신을 보고 전신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요술쟁이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근대의 세례는 그 이전까지의 인지 체계를 모두 뒤흔들 정도의 충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이승원) 그리고 이러한 조류가 문학 텍스트에도 영향을 끼쳤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19184, 옥천 출신의 열일곱 살 소년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오백 년의 조선왕조 사직이 정리되고 고작 십 년 조금 넘게 한반도를 치세하던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다시 팔, 구 년쯤 지난 후의 일이다. 이미 열두 살에 신부를 맞아들인 이 소년은 처가의 친척 집에 사 년쯤 기숙하다 이 학교로 들어와 훗날 초기 한국문학사에서 빠지지 않고 거명되는 인물들과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홍사용, 박종화, 김윤식, 이태준 등이 그들이다. 1학년 때 88명 중 수석을 차지하지만, 이듬해 삼일운동의 후유증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하다가, 전경석, 이선근과 함께 휘문 사태(1919. 학교 시설의 빈약, 교원의 자격 미달 등을 지탄한 동맹휴학사건)에 관여한 전력으로 무기정학을 받은 후 사태가 정리되고 나서야 복학한다. 1922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그는 풍랑몽(風浪夢)이라는 제목의 시를 최초로 쓰며, 다음 해 하정 공의 지원으로 도시샤대학에 입학, 졸업 후 모교로 돌아와 영어를 가르치고 시문학, 구인회등의 동인에 참여한다.

그의 수업에 대해서 한 휘문고보의 졸업생은 1학년 때의 영어 작문 수업의 교사를 "50분 강의를 제대로 다 못 하시는 분"으로 회고하는데, 이에 덧붙여 "수업시간 중 중얼중얼하시던 일이 바로 우리 말을 다듬는 과정"이었음을 후에 시집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고 말한다. (이명구) "우리 말을 다듬는 과정"이란 일반적으로 일상어를 시적 언어로 바꾸어내는 작업일 텐데, 첫 시편이었던 풍랑몽의 화자는 "당신"이라는 한 구원자를 기다리면서 업는 우름, 바다를 안으올 / 葡萄빛 밤 이 밀녀 오 드시오거나, “銀灰色 巨人/ 바다 사나운 날, 덥처 오 드시”, 또는 고리 가튼 새벽 달/ 북그럼 성 스런 낫가림을 벗드시올 것인가 자문한다. '바다'를 안거나, '회색빛 거인'이 걸어오거나, '새벽달이 부끄러운 낯을 벗듯이' 올 것이냐고 묻는 대목은 곧 "당신"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대자연과 비등한 존재임을 내포하며, 산문화된 언술보다 크기와 규모, 형상과 움직임을 시적으로 압축/은유시키는 과정이 이 "다듬는 작업"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때쯤 그의 선배들이었던 박종화와 홍사용은 현진건, 이상화, 나도향 등과 함께 백조동인을 결성하여 낭만성을 견지하고자 하나, 본래 낭만주의라는 것이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천상의 것을 향한 희구로 작동하는 데다 삼일운동의 실패와 문화통치를 가장한 당시 사이토 마코토의 정책 등으로 인해, 낭만주의는 결국 환멸의 중독으로 변질되고 허무적이고 퇴폐적인 작품들이 주로 발표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전 생애를 조선어의 시적 조탁에만 바쳤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조선어의 운용과 수사에 있어 완벽의 경지에 다다른 이는 그도 인정하듯 김영랑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보아 휘문고보 시절부터 영어권의 문학에 관심을 두었음이 자명한데, 문예사조들이 산업기술의 발달과 평행을 이루면서 선대(先代)의 결점을 보완하는 식으로 전승되어온 서구권과는 달리 조선은 기술과 사조가 한꺼번에 유입되었던 시기를 맞았는데다 동시에 국권이 침탈된 과거의 나라였으므로, 그가 비록 십대 후반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못 거대한 심적 괴리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 중 근대화된 문물을 시의 재료로 형상화한 시편들에서 주체는 그 문물들을 용이하게 통제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억압되고 매몰된 자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1926년에 카페프란스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이 시엔 앞의 회고글이나 풍랑몽의 우리말 조탁이 무색할 정도로 다수의 외국어가 등장하는데, 예컨대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러시아의 전통의상인 "루파스카"를 입고 있다거나 "보헤미안 네타이"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바깥 풍경을 "페이브메트에 흐늑이는 불빗"으로, 타인과의 인사를 "굿 이부닝!" 등으로 제시한다. 일단 루파스카나 보헤미안 넥타이는 의상에 지나지 않으나 타자의 신체가 외국의 옷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이미 대도시 전반에 이식되어 있는 근대성을 나타내고, 인도(人道)pavement, 안녕을 good evening 등의 영어식 발음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사람 뿐 아니라 도시 전체를 지시하는 언어 역시 근대의 공기에 휩싸여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영어식 표현은 후에 1930년대의 김기림과 이상의 텍스트 또는 1950년대 전봉건의 전쟁시에서 전면적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화자는 "자작(子爵)의 아들"처럼 높은 신분이 아니기에 웃고 떠드는 타자들의 무리에 섞여들지 못하고 "大理石 테이불에 닷는 내 이 슯으구나"라며 그저 "異國種 강아지"를 부르며 발을 핥아달라고 할 뿐이다. 타인의 모습과 언어가 모두 영어식인데 강아지만 "이국종"이라고 지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변화에 의해 축소되어버린 자신의 처지가 강아지의 그것과 진배없다는 사실을 자조한다고 볼 수 있다. 같이 발표된 爬蟲類動物에서 화자는 기차를 "식거먼 연기와 불을 배트며/소리지르며 달어나는/괴상하고 거--한 파충류동물"로 은유하며, 심장, 담낭, 소장, 대장 등 그 열차의 객실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소화기관의 한 부분에 대입하여 생각함으로써 생활의 편리함보다 다수의 량()들이 연결된 모습에서 엄청난 위협을 느낀다. 그런데 이듬해 발표한 슬픈 기차에서는 파충류와의 유사성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 기차에 탄 화자 자신의 내면으로 초점이 맞춰지며, 뒤로 사라져가는 풍경들과 나이 먹음aging의 서글픔을 병치시킴으로써 기차를 '우리들의 기차'로 표현한다. 앞서 기차가 마치 근대를 표상하는 섬뜩한 이미지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봄날의 하루와 배추꽃 비탈 등 목가적인 풍경들을 지나쳐가는 정경을 제시하면서 아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나 는 아들 이 아닌것 을, 웃 수염 자리 잡혀가 는, 어린 아들이 버얼서 아닌 것 을"이라는 화자의 탄식조로 보아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시간, 고향에서 도시로의 시간, 어린아이에서 아버지로의 시간, 출발점에서 종점까지의 시간 등 복합적인 궤적이 화자의 '슬픔'으로 모두 귀결됨을 볼 수 있다. 이 슬픔은 자아의 억압을 해소하거나 치유하는 매개라기보다 오히려 근대성을 수용하고 체화함으로써 이를 조우하고 직면하기 위해, 그리고 현실의 제약이 미치지 않는 자유로운 꿈속으로 아들을 들여보내기 위해 언제나 깨어 있는 자아를 지속하려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1927년에 發熱, 1930년에 琉璃窓, 1931년에 琉璃窓 2을 발표한다. 먼저 發熱琉璃窓을 이루고 있는 주된 심상은 질병에 의해 약화되어가는 심신과 죽음 이후에 이편에 남겨진 무기력한 자아에서 발견되는 상실의 감정이다. 일반적으로 琉璃窓에 대한 해설은 시인이 폐결핵으로 죽은 아들을 애도하기 위해 썼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아들'을 단지 시인의 아들로서만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이 적절치는 않아 보인다. 앞서 슬픈 기차에서 화자가 아들을 재우기 전에 자신이 아들이 아님을, 그리고 어린 아들이 버얼서 아닌 것을이라고 탄식하는 진술이 선행되었음을 주목하자. 슬픈 기차아들은 표층적으로는 화자의 자식이지만 심층적으로는 화자가 떠나온 자신의 유년기 자아가 재현된 모습이랄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琉璃窓의 첫 구절인 "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는 실내에 선 화자가 바깥에서 자신이 애착하던 대상의 상실이 야기해오는 서글픈 잔여를 나타낸 것인데,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와도/ 만 밤이 밀너가가고 밀너와 부듸치고"에서 나타나는 행위와 발생의 반복은 곧 단발적인 사건이 아닌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연속성의 양상을 내포한다. "밤에 홀노 琉璃를 닥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여니"는 안과 밖의 경계인 창을 닦아 투명을 배태시키려는 욕망이 드러난 구절이며, 다시 말해 어린 아들에서 아버지가 된 자신과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요절한 아들 사이에 드리워진 불일치를 인내하려는 태도가 곧 "외로운, 황홀한 심사"인 것이다. 마지막 대목인 "고흔 肺血管저진 채로/ 아아, 늬는, 새처럼 날너갓구나."에서 '폐혈관'이 찢어진 사람과 ""는 동일한 인물임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들' 한 사람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폐혈관의 균열은 아들의 사인(死因)이지만 동시에 아비인 화자가 내적 균열을 앓는 증세이기도 하며, 먼 곳으로 날아간 ""는 화자(아비)의 유년 자아이기도 하다. 1927년의 發熱에서 화자는 주사자국이 난 아들의 머리에 입술을 대고 '다신교도'처럼 많은 신들을 불러 차도를 기원하며, 또한 병마와 싸우는 아들의 모습과 백약이 무효한 현실 앞에서 불도 약도 달도 업는 밤/아득 한 한울 에 는,/ 별 들 이 참벌 날으 듯 하여라고 말한다. 이 기원은 죽어가는 아들과 생동하는 자연을 한 자리에 호명함으로써 아들의 차도를 바람과 동시에 가시적으로 예견된 상실 앞에 선 자신이 붕괴하지 않도록 지키려는 욕망이다. 즉 앓는 아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아비는 신체적으로는 분리되어있으나 심적으로는 결합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琉璃窓 2에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유년 자아를 상실한 화자가 자신을 "항안에 든 부어"와 같이 무기력 속에 유폐될 수밖에 없는 우울증적 상태로 변주된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상실 테마가 관류하는 세 편의 시 중 마지막인 琉璃窓 2는 애착 대상의 상실 이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나는 이 오른다/뺨은 차라리 戀情스레이/유리에 부빈다. 차듸찬 임마침을마신다". 아들의 증세가 아비에게로 전이되면서 결국 시적 주체는 앓는 자가 되고 열이 들끓는 탈수 상태에 빠진다. 이 충족 불가능의 욕망이 일견 해소될 기미를 여는 지점은 바다를 질료로 한 시편에서 비치기도 한다.

 

근대적 표상들이 도시에서 주로 생산되었다면 바다는 그러한 근대적 구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세계, 그러나 주체가 제대로 포괄해낼 수 없는 광대하고 숭고한 세계로 생각해볼 수 있다. 흔히 바다를 푸른 도마뱀에 비유한 작품(1935)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바다를 제목으로 한 시들은 1927년에 두 편, 1930년에 3, 1932년에 1, 1935년에 1편 등이며, 19272월에 집필된 작품은 후에 상재될 시집에 네 편의 시로 분절되어 실린다는 점을 감안해도, 바다, 호수, 갑판, 선창, 등 배와 바다의 광대함에 대한 텍스트는 분명 그의 대표적인 시적 공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바다는 도시의 경계와 구획을 모두 깨부수고 오직 주체적인 감각과 인식으로만 표상될 수 있는 대자연의 역동적인 지평이다. 대표적으로 나(사람)와 바둑돌(사물)의 관계를 초월적 존재인 당신과 나의 관계로 치환함으로써 앞서 제시된 나와 바둑돌의 변별의 무화를 이끌어내는 작품(19273월 발표), 수평선 위에 내린 태양을 백금의 팽이를 돌리는 나의 영혼으로 표현한 작품(19309월 발표), 한량없는 죽음을 배태한 위압감을 마치 가슴에 내려앉는 나비로 치환한 후 사랑의 나래로 전환시키는 작품(19325월 발표) , 그는 도시와 터전으로 침투하는 근대를 피해 바다 너머의 수평선으로 항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1935년에 그는 다시 海峽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배에 올라 地球우로 기여가는것이 이다지도 호수운것이냐! 외진곳 지날제 汽笛은 무서워서 운다. 당나귀처럼 凄凉하구나라고 읊는다. 배는 근대 문명이 도사린 대도시를 떠나 모든 구획들이 하나로 통합된 지구를 횡단하는데, 해협을 통과하는 배의 속도는 일견 경쾌하지만, 여전히 선박의 기적소리엔 닿지 못하는 곳에 대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이 양가적인 감정 사이를 관류하는 시인의 항해에서 획득되는 감정은 결과적으로 삶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戀愛보다도 담배를 먼저 배울 수밖에 없었던 고독으로 표상된다. 마스트에 선 시인은 근대 너머를 항해하고자 욕망하지만 결코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상륙하지 못하며, 그의 초기 시 전반을 이루는 바다의 이미지는 시작과 끝이 소거된 채 유구한 항로를 계속해서 건너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29년부터 1943년까지 모교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한다. 1923휘문창간호에 타고르의 키탄잘리를 번역 수록하고, 재직 중에 윌리엄 블레이크나 휘트먼, 미하일 레르몬토프 등 다수의 외국 문인들의 작품을 조선어로 옮겼다. 또한 그는 카톨릭적인 시도 조금 남겼으며, 국권침탈이나 근대적 도시화 등으로 표상되는 시대적 조류가 미치지 않는 미지의 숭고한 영역을 향한 희구에서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수난과 초월의 형식"이 너무 부각되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후세의 평을 듣기도 한다(김우창). 그는 휘문고보를 떠나 잠시 이화여전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한국전쟁 직후 납북되어 소식이 전하지 않는다. 함경도 출신이었던 백석은 전쟁 후의 기록이 발견되어 1996년에 작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지용의 경우 여전히 학계에서는 납북 이후 북한의 자료에 의거한 925일 사망 기록을 정설로 따르며, 확실한 증거는 아니고 잠정적인 결론에 그친다. 그의 작품들은 가곡이 되어 수많은 가객들에 의해 불렸고,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모더니스트 또는 이미지스트를 거명할 때 제일순위로 떠오르는 고유명-여섯 살 아래의 김기림과 쌍벽을 이루는-으로 남았다. 각지에 그의 시를 아로새긴 시비들이 건립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의 모교인 휘문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그가 전쟁 직전 정치보위부에 자발적으로 방문했다는 기록 탓에 군사정권은 시집을 금서로 지정하는 무지의 만행을 저지르며, 백석과 이용악도 대표적인 금서처분의 작가로 분류되었다. 이들 시집들은 민주화와 함께 해금되고, 그의 작품세계는 서강대의 김학동 교수가 전집을 간행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복권된다. 그와 같이 휘문고보를 다녔던 이들은 이름보다 호로 문학사에서 더 많이 호명된다. 노작, 월탄, 영랑, 상허 등이 그것이며, 이 네 명 모두 한국문학사에서 결코 누락되지 않는 큰 족적을 남겼는데, 그는 끝까지 지용(芝溶)이라는 어릴 적의 이름을 평생 동안 가지고 갔다.

 

 

참고문헌

최동호 편, 정지용 전집 1 , 서정시학, 2015

김학동 편, 정지용 전집 - 산문, 민음사, 2013(1988), 347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2, 고종 2010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들 1, 민음사, 2012(1977), 53

김윤식,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 2, 그린벌, 2016

노형석, 한국 근대사의 풍경, 생각의나무, 2006

서명일, 육영공원의 교과서와 근대 지식의 전파, 한국사학보(56), 2014

이명구, 나의 휘문 시절, 휘문45, 1977, 108; 휘문고등학교문예반. 휘문교우회, 白潮에서 남한산성까지, 2008, 14면에서 재인용

이승원, 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2012, 20-22

이원조, 발문, 상허문학독본, 247; 김윤식, 문학사의 라이벌 2, 그린비, 2016, 65면에서 재인용

휘문고등학교, 徽文100年史 1, 다락방, 2006, 128-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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